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어리 Oct 29. 2022

그리어 랭턴

몸에 대한 탐구, 경외감을 자아내는

2014 겨울, 뉴욕 이스트 타운의 작은 갤러리 파티시펀트사(Participant INC)에서 그녀의 회고전을 보았다. 1958 태어나 마흔 살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 그리어 랭턴(Greer Lankton). 사진작가  골딘, 가수 이기 팝 등과 교류했던 그녀는 뉴욕 1980년대 이스트 빌리지 예술의 중요인물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작가에 관한 정보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처음 전시장에 가득한 그로테스크하고 외설적인 인형들을 마주했을 땐, 심하게 말해 노출증이 있는 여성이 뒤틀린 성적 욕망을 표출한 정도의 작업이겠거니 생각했다. 한데 조금 후 전시실 벽면에 쓰인 글에서 그녀가 스물한 살 때 성전환 수술을 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녀의 작업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성적 정체성을 작업의 주요 테마로 끌어들인 그녀의 인형들은 초현실주의 조각의 선구자인 독일인 예술가 한스 벨머(Hans Beller, 1902-1975)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형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전혀 초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정상'의 테두리 바깥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충분히 현실적인 몸을 묘사하고 있다. 장애를 가져 뒤틀린 몸, 과체중으로 육중한 몸, (작가 자신이 경험한) 거식증과 약물중독으로 비쩍 마른 몸...  그렇게 실제 인체의 크기로 제작된 인형들에 작가는 인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의자에 가지런히 배열된 (혹은 앉혀진) 인형들과 가족사진을 찍듯 사진을 찍고, 각각의 인형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때론 옷처럼 제작된 비만형 인형에 들어가 다른 정체성을 연기하기도 한다.  


"여아적인" 성향 탓에 또래집단의 멸시와 소외감에 시달리던 유년기를 지나 그랙 로버트 랭턴(Greg Robert Lankton)은 스물한 살, 장로교회 목회자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동료 예술가 폴 몬로(Paul Monroe)와 깊이 교류하고, 또 결혼까지 한 그녀는 한편으론 약물중독, 거식증과 싸우는 고단한 생애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결국 마흔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전시장에는 랭턴의 인형 작품들뿐만 아니라, 편지들, 자전적인 기록들, 사진들과 직접 제작한 작은 소품들, 장난감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하트 모양의 선물 상자에 빼곡히 붙어있는 사진들, 드랙퀸 분장의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은 마치 쌍둥이와 같은 그들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일시의 증거가 유리 쇼케이스 안에 유품으로 담겨 쓸쓸한 정서를 자아낸다. 퇴폐적이고 문란해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사생활조차도 죽음 이후엔 그 죽음을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전시는 그녀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동료 예술가들의 후원으로 꾸려질 수 있었다고 한다. 초겨울 추위에 잔뜩 껴입고 무장한 채, 사적인 추억의 기록들, 아무렇지 않게 진열된 나체들을 '감상'을 빙자해 엿보는 동안, '바라보는 자(spectator)'로서 관객이 지닌 시선의 권력이란 걸 새삼 느끼게 됐다. 그녀의 깡마른 몸을 보며, '보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죄책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것은 경외감. 단지 경탄이 아닌 관객에게 죄의식마저 이끌어내는 그런 작가의 역량에 대하여...




작가의 이전글 예술가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