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를 꾸준히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기술지원센터에서 꽤 오래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상담원으로서 나는 자사 솔루션에서 제공하는 기능의 유무, 설정방법을 설명하고 잘못된 설정으로 인한 에러 발생시 해결방법을 알려줬다. 간혹 이 솔루션 자체의 에러라고 보이는 케이스는 에러 증상과 발생 조건을 조사하여 보고하기도 했다.
나는 상담원으로 일하면서 꽤나 인정을 받았다. 해당 기술지원센터는 운영 특징상 대리점들이 반복적으로 전화를 했는데, 그네들 중 상당수가 '○○○상담원과 통화 될까요'하며 날 찾았다고 한다. 일부 대리점 담당자는 빵이랑 우유도 주고 가고, 통크게 간식을 쏘고 가신 대리점 사장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내가 시시콜콜 떠벌이고 다닐 것도 아니고. 당시 나의 존재로 인해 상대적으로 마음이 불편했을 다른 상담원도 있었을지 모른다. 내 나름대로는 마음을 다해 좋은 상담원이 되고팠고 어느 정도는 목표한 방향대로 상황을 만들며 살았구나에 만족한다.
그런데 와중에 이런 말도 들어보기는 하였다 : "너는 □□학교 씩이나 나와서 상담원이나 하고 있니? 학교가 아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좀 아까웠다. 내 동기나 선배분들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곳에 입사하신 분이 적지 않았다. 지금도 한참 부족하지만 지금보다 더더더 부족했던 내 20대 시절에는 나의 위치와 상대방의 위치를 비교하며 열등감에 시달리는 나날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상담원 일에 열심히 매진했던 건, 그 열등감만큼의 간극을 극복 해 보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되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이제는 그런 열등감에 휘둘리지까지는 않게 되었다 정도?
여하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나누어보았던 많은 불통 덕분에 '온전한 소통'이란 얼마나 힘든가를 절실히 알게 되었다.
서로 가진 배경지식이 달라서, 배경지식의 수준차이가 너무 격심해서, 순간적으로 자신이 상황판단을 잘못해서, 내가 생각이 많아서 상대방의 말 자체에 집중을 못해서, 수화기가 지직거리거나 말소리가 멀리 들려서, 지금 이 대화를 처리하기에는 여타 처리할 일이 많아 집중이 안되서, 내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서 등등등등등. 온전한 소통이 이뤄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작은 기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것마저 '그렇게라도 정신승리 하지 않으면 네 인생이 너무 불쌍해지는 것 아니겠니'라고 말한다면....? 이지경까지 오면 어느 인생이 불쌍해지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오해야말로 우리 일상에 늘 있는 일이다. (오해를 만드는 일은 좀 다른 계열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갈라치기 다메요.)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 주변에는 적극적으로 앎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 거짓말을 반복하여 진실인마냥 말하는 자들, 타인의 성취를 질투하는 자들 등이 있다. 이는 흔히 만날 수 있는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냥 그러하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하여 그래야만 한다고 집작하는 순간부터 내가 루저인 셈이다.
비이상적인 이 세상을 마주한 뒤, 그 다음 조치는 당신의 몫일 것이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다는 것도, 이것만큼은 안된다고 선을 그어두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 어떠한 선택은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그 결과에는 생물학적, 심리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플러스 효용을 가져오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로 마이너스 효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걸 개인 또는 사회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느냐 마느냐는 문제도 생긴다. 다행히 역사적으로 똑똑한 여러 위인들께서 '내가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하니까 이게 나은 것같아'라는 뭍한 아이디어를 내놔주셨다. 그들의 재능기부 덕분에 현대인들은 도덕에 대한 감각을 좀 더 섬세하게 가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선대 위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생물이다. 어떤 외부자극에 대하여 좋다/나쁘다를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반응 해 버리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나에 대한 인정과 긍정은 나를 기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구조까지 포함시키는 게 적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 좋음에 대한 지향, 나쁨에 대한 회피를 중도를 넘지 않는 수준으로 따르며 살 예정이다. 나의 위대함과 하찮음은 생물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살아있기에.
어쩌면 내가 이런 글을 올린 후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어떤 감정적 울림과 새로운 감각에 눈뜨는 그 순간이! 글로서 소통하는 오늘의 작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한 말하고 싶다. 찾아와 주시고 읽어 주시고 헤아려 주심에 머리숙여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