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끼얹은 넋두리

by 힙스터보살


돌고돌고돌아 결국 집착에 대한 글을 쓴다. 이미 붓다께서 고통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여 생긴다 말씀하셨지만. 다이어트는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공부는 스스로 하려고 할 때 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건만. 꼭 다른 묘수는 없나 두리번 거리다 걸려 넘어지고 몇 바퀴 구르다 겨우 원점에 선다.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냥 원점에 섰으면 좋았을 것을. 그마저도 좀 더 쉽게 답을 찾아보고픈 욕구를 내가 덥썩 잡아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미 벌어진 어리석음을 나무랄 법도 하지만 그 나무람마저 어리석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의 발로일테지. 그저 그 욕망이 흘러간 자리를 지켜보고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이쯤되면 미묘하게 알게된다. 언젠가 내가 어떤 욕구가 끓어오르는 시점을 마주하게 되면... 그 때까지도 내 생각을 강하게 붙들어 매는 이 습관이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겠구나. 실현되지 않은 미래이지만 마치 예언을 하듯 그림이 그려진다. 미래를 알면 고칠 여지가 생기긴 하련가? 그러기에 욕심은 처절할만큼 뜨겁다.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다.





우주는 우리의 욕망과 무관하게 돌아간다. '알되 개입하지 않는 신'의 이미지는 어쩌면 이와 같은 우주의 모습을 모티브로 따온 것은 아닐까 싶다. 우주는 드넓고 현현한 모습이 다양하다. 너무 다양하여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 다양한 존재들 중에는 무엇이 우월하거나 열등할 것이 없다. 때문에 모든 것이 존중의 대상이 되기도, 그 무엇이든 허망한 우주의 먼지가 되기도 한다.


와중에 생명체로 태어나버린 나란 존재가 있다. 유전자를 후대에 넘겨주기 위한 도구밖에 안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나조차도 그러한 목적이 주어진 삶 덕분인지 생에 대한 본능적 의지가 있다. 이를 기반으로 온갖 욕망들이 합쳐지고 변형되며 창조된다. 애욕 덕분에 살고자 하나, 애욕이 넘쳐나도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럴거면 애초에 유전자 시스템은 왜 구현한 건지가 궁금해질 지경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는 하지 않지만 시뮬레이션 게임은 좋아하나보다.


호불호를 감지하는 시스템은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동작한다. 짐작건대 이는 생물이 살아남기 위한 매커니즘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생명체인 나는 그 시스템이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동작할 것임을 안다. 고대의 인도인들은 이를 가리켜 까르마(Karma)라고 했음이라. 붓다도 그리 말씀하셨음이라. 업장을 해소하는 방법에 깨달음이 있음이라. 그렇게도 우러러보는 '깨달음'이라는 단어도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의 하나는 아닐런지.


쨌든 그놈의 업장(Karma) 때문에 우리는 기준을 세우고 평가를 하고 따르거나 또는 회피한다. 심지어 안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여럿이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우주가 공평무사하다는 점과 불협화음을 낸다. 때문에 인생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런지도 모른다. 변화는 그 상황 자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도 하니까. 고통으로 가득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접근은 오히려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을지 모른다.


받아들이겠다 맘 먹는 것과 받아들일줄 아는 능력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어떻게든 내 마음을 넓히려 아등바등거리는 과정 역시도 고통일 것이다. 더 열심히 극복하려 들수록 더 커지는 불협화음에 지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치열한 궁구의 과정에서 줏어먹듯 깨달음 회로에 불이 들어오기도 한다 - 아아, 불협화음도 결국 '화음의 한 종류'로구나. 다들 그런 불협화음을 견디며 나아갈 방향을 궁구하고 있구나. 때문에 나는 토론 모임을 만들고 도반을 두어 소통하는 것이었구나.





브런치에 글이 쌓이고 독서모임 햇수가 늘어나고 도반과의 우정이 깊어져도 욕망하는 생물체의 번뇌는 여전하다. 붓다를 비롯한 몇몇 유명한 조사(祖師, 큰스승)분들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거사님들과 보살님들이 나름의 깨달음을 품고 회향(廻向, 자기가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림)하셨대도,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이 선뜻 되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가볍게 '야 나두~' 외치고 종종종 뛰어나 가볼까.


그렇게 지내도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도 해본다. 그런데, 이정도 쯤 되면 되면 생사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일까 싶다. 생물로서 주어진 고통 못잖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 충분히 즐기다 간다한들 뭣이 문제이리. 고통에 휩싸이며 손해보듯 살 바에는 적당히 즐기는 게 밑지지 않는 장사다. 뭐 이렇게 정신승리하는 생명체를 보고파서 무심한 우주는 오늘도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잘 보고 계시죠? 소풍이 꽤 즐거워요. 나중에 봅시다. 강녕하세요.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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