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 찾는 삶의 의미

by 힙스터보살


* 이 글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쓰는 후기입니다.



전에도 한 번 글로 남겼지만, 나는 인생과 감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허용되는 자유과 지켜야 하는 규율은 삶이 허용하는 범위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스케일과 엄격함의 차이일 뿐 구조적인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감옥이 현실의 삶과 꼭 같지도 않다. 누구나 잘 알겠지만, 수감자는 일반인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을 견뎌내야 한다. 때문에 감옥은 오히려 극적으로 인간의 삶이 어떠한지 혹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꽤 인상 깊은 메시지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본인 스스로가 심리학자이면서 또한 나치 수용소 수감자이기도 했다. 감옥 중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나치 수용소'에서 저자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히 보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누가 무어라 시키지 않아도 발동되는, 수감자들의 각종 생존기전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건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수 있을까? 내 삶의 고난은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생에 의미란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내 의식이 집중된 단어는 '무감각증'이었다. 저자가 말하기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이는 행동패턴이 바로 이 무감각증이라고 하였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던 독서모임의 지인이 떠올랐다. 평소에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그녀는 현재 외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쉽지 않은 가족사를 겪었다. 연고가 없는 타지에서 겪는 고난은 분명히 그녀에게 적지 않은 위기의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그녀의 생존본능은 감정스위치를 끄는 방식으로 동작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그녀의 안부도 물었다. 다행히 지금은 좀 여유 있게 지내며 감정반응이 돌아온다고 하더라)


돌이켜보니 나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나치 수용소 수감자들이나 타향살이 수난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지원이 풍족하지는 못했던 집에서, 나의 고등학교 공부는 그날 그날의 예습과 복습, 어쩌다 한 번씩 다녔던 학원으로 근근한 성적방어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마주하게 된 고3 수험생활. 과열된 입시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 이렇게 읊조리고 있더라 :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것도 사치야. 힘들 시간에 해야 할 것을 해'. 그렇게 건조한 인간이 되어갔다. 다른 의미로 건어물녀가 되었던 시절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감정의 문을 닫고, 나아가 감각의 문을 닫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이었다. 그녀도 나도, 그때 당시에는 감정의 문을 닫았기에 살아남을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극단적인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그 감각을 하나하나 다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져 버린다는 것을. 고통에 찌들어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것보다, 내 감정(또는 감각)을 마비시켜 앞으로 나가기라도 하는 게 생존에 유리해 보인다. 이 과정이 애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발현된다는 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보존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 봄 직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생존본능은 어느 순간 인간의 또 다른 특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는 것이 얼핏 보면 인생 자체를 허무주의로 바라보는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만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시라.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정해도 된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생활은 이미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힘겹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도 유희거리를 즐기는 게 사람이었다. 저자 스스로도 너무도 생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생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이 점을 알리고 싶어서 책의 원제도 <Man's search for meaning>로 지은 것이리라.


삶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문(= 삶의 의미)에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는 무엇입니까?"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나를 기준으로 한 의미일 수밖에 없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내'가 바라보며, '내가 느낀' 것을 기반으로 하여 생성된 '나의 생각'이 의미부여의 중요한 한 축이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이나 덕행을 추구하되, 내가 능동적으로 설정한 그 의미가 진실로 의미 있는 게 아니겠는가. 불교적으로 접근하자면, 난 이 책의 메시지가 법귀의 자귀의(法燈明 自燈明, 법을 등불 삼아 의지하되, 자기 자신도 등불 삼아 의지하라)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의미를 찾아내고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에, 삶은 절대적인 가능성과 가치를 가진다는 저자의 견해도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가능성'만 따지자면 인간은 타락하는 가능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타락하는 인간, 포기하는 인간을 그는 이미 마주하였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의미를 발견하는 인간'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게 곧 그가 살아남은 방법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고통으로 가득 찬 생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에 '의미'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히는 것이리라.


이번에 읽었을 때에는 생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데에도 눈길이 간다. 고통으로 가득 찬 생일 지라도 살아갈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되는 선행조건은, 생물의 생존본능이라는 지독하리만큼 강렬한 까르마(Karma)의 존재다. 본능에 이끌려 사는 짐승들은 짐승의 방법대로 생존방법을 체득한 것이고, 본능에 이끌려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인간의 방법대로 생존방법을 체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걸까나...?)


문득 궁금하다. 이 책의 독자들은 생을 갈구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눈길에 가는지, 아니면 끝끝내 생물이라는 테두리에서 옴짝대는 인간의 한계에 눈길이 가는지. 혹은 고통의 순간조차 이에 대응해 나가는 생물의 놀라운 적응력에 눈길이 가는지. 변화와 고통에 대응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이라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위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어떤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관점에 따라 맞이하게 될,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 사뭇 궁금하다.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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