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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조차 회피하는 대자유인의 삶

by 힙스터보살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지만 또한 사주팔자도 썩 믿지 않는 편이다. 사주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어떤 거대한 흐름이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엄정하게 그게 유의미한 데이터인가를 검증하자니 '굳이...?'스럽다. 사주는 심리적 안정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게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내 주변의 엄마들 중에는 사주에 꽤나 진심이신 분들이 있다. 사주를 비롯하여 신점까지 용한 집을 찾아다니는 분들이 있다. 아이까지 낳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남편 하나에 내 인생을 통째로 의지해야 하는 가능성이 팍 올라가기 때문에 (게다가 그 남편이 믿음직스러운 경우는 꽤나 레어하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처로서 사주와 점에 의지할 수 있다고 본다. 나 역시 같은 처지를 경험한 엄마이기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K-사주 활용법이 발전을 거듭했나보다. 쇼츠를 보다가 기가막힌 사주회피법을 보았는데 그 경지가 심상치가 않다. 단순히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넘어, 운명론적 세계관을 재창조 해버리셨다 :

* 칼 맞을 사주다 --> 쌍커풀 수술로 회피

* 피 볼 사주다 --> 헌혈로 회피

* 교통사고 날 사주다 --> 범퍼카로 회피

* 망신살 뻗칠 사주다 --> 공중목욕탕으로 회피


캬...... 제갈공명도 울고가겠다!!! (쇼츠 댓글에 나온 사례는 더 기가막히다 ㅋㅋㅋㅋㅋㅋ)


이건 진챠.... 회피 만랩이시다~!


나에게 운명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납니다' 수준의 운명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의 큰 흐름은 어느 정도 정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관점 중에, 특정 인물이 그 시기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 누군가는 역사의 큰 흐름이 거쳐갈 뭔가를 만들 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처럼.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세계를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을 누군가는 나타났을 거라는 식의 접근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존재가 무의미하느냐? 그렇지 않다. 어찌되었거나 그 개인이 실재하였고 선택한 바대로 인과가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네 삶을 바라봤을 때 큰 흐름이 정해져있다고 하더라도, 그 삶을 살고 있는 주체로서의 나는 내 본위의 호불호에 따라 이 순간을 산다. 그 호불호마저 운명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선호/회피 반응을 운명의 관점으로 재단하기에는,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꼴이 너무 제각각이다.


최근에 과학 관련 영상을 보다 알게 된 개념이 있다. 블랙홀의 상보성 원리(Black Hole Complementarity Principl)라는 건데, 내용이 사뭇 흥미롭다. 배경상황은 일단 이렇다. 어떤 비행선이 블랙홀 주변을 지나다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버렸다. 잘 아시겠지만, 사건의 지평선을 넘은 물체는 더이상 블랙홀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블랙홀은 너무도 강력한 중력을 가진 천체이기에 사정없이 비행선을 빨아들인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우주선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며 증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비행사'의 입장에서는 사건의 지평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고 온전한 상태로 블랙홀로 낙하한다고 느낀다. 두 상황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나 둘 다 인정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나는 이런 블랙홀의 상보성 원리가, 인생을 살아내는 입장과 인생을 바라보는 입장의 대비와 유사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전에 스님으로부터 '인생은 가까이 보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모이지만, 멀리서 보면 가는 길이 정해져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때 느꼈던 느낌과 결이 같다. 블랙홀의 상보성 원리도 스님의 말씀도 얼핏 보기에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로 진실에 가까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고체계 상에서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본디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人生)이 대자유인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쓰다보니까 글이 갱장히 Deeeeeeeep해지는 기분인데?ㅋㅋㅋ) 세상이 모순되어 보인다는 건 우리가 어떤 '사고(思考)'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럴 뿐인 것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우리가 모순되었다고 인식하든지 말든지 그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운명론을 지지하여 자유의지를 폄훼할 이유도 없고, 자유의지만 믿고 운명을 배척할 필요도 없다. 삶이란 그러한 것이라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지는 게 차라리 낫지 싶다. 운명이 실제하듯 받아들이는 태도와 내 운명을 만들어나가겠다는 태도를 내 입맛에 맞게 그때그때 선택해도 큰 문제가 없을 듯하고. 말 그대로 Nothing matters.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면 선택에 있어 망설일 게 무엇이 있으리. 개취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다. 하나를 선택했다고 하여 나머지에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야말로 대자유인(大自由人, Arhat, 아라한)일 것이다. 사주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 문제를 이리 바라보고 보고 저리 바라보며 파훼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 어메이징한 사주회피 무빙이 나오는 것이겠지.


그럼 나는 어떠한가 돌이켜보니...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옭아매지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고정적인 사고방식조차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만, 사십줄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도 그 사용법이 아리송하다. 다행히 100세 시대를 운운하는 요즘이니, 고정적 사고방식을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탐구할 기회가 아직 있다. 한 이십 여 년 느릿느릿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다보면 뭘 접하든 귀가 순해지는(耳順) 시기가 와 주겠지? 가보면 알 터이다. 그 때까지 혼자서만 가면 좀 심심하니까 도반도 모으는 중~



* 불가에서 말하는 '도반(道伴)'이란, 함께 수행정진하는 동료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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