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다. 감옥을 소재로 한 영화나 시리즈는 앵간해서는 기본 이상으로 재미있는 것같다. <프리즌 브레이크>도 그렇고. 삶이 바빠서 아직도 못봤지만 <브레이킹 배드>도 언젠가 봐야지 싶고. <오렌지 이즈 뉴 블랙>도 눈길이 가더라. 영화 중에서는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그리고 <라스트 캐슬>을 재미있게 봤다. 아 물론, 내가 감옥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감옥에 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감옥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감옥은 정해진 일과대로 하루를 보내야 하고, 여러 가지 행동의 제약이 뒤따르는 곳이다. 수시로 감시를 받아야 하고, 행동반경이 정해져있다. 필연적으로 '죄', '억압', '박탈'과 개념과 얽혀있다. 그리고 '감옥'이라는 개념으로 인하여 반대로 '해방'이라는 개념도 생겨난다. 감옥이라는 세계의 한정은 필연적으로 감옥 외의 세계를 존재케 하는 효과가 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생각 해 보다보니... 우리의 삶이 감옥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같은데? 우리도 원하든 원치않든 정해진 하루를 보내야 하고, 여러 가지 규범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삶을 살지 않던가? 생활반경의 넓이가 넓고 적용되는 룰이 많으면 감옥이고, 반경의 넓이가 좁고 적용되는 룰이 적으면 삶인가?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단순 비교를 하면 둘은 스케일 차이밖에 안 난다는 생각이 든다.
억압이라고 하니까 고행자들이 문득 떠올랐다. 힌두교의 고행자들은 막 몸에다가 구멍을 뚫는다든가 팔 한 쪽을 못 쓰게 한다든가 식으로 몸을 학대한다. 그 이유가 뭔고 하면, 해당 부위를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부위의 본질을 깨닫게 함이라고 하더라. 하기야 우리도 다리 다쳐서 며칠 못 걸어다니면 다리의 소중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 수 있긴 하지. 고행자들의 그것과 나의 삶은 easy mode냐 hard mode냐의 차이가 있는 것같다. (어쩌면 그냥 삶조차 hard mode이신 분들도 있고)
그렇게 치면 감옥의 존재는 억압으로 인하여 무언가의 본질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장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마치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야 진짜 중요한 게 뭐였는지를 깨닫는다든가, 수탈을 경험해 본 집단이 정체성이 강해지는 원리를 경험하듯 말이다. 그렇다면 감옥이 억압하는 대표적인 가치인 '자유'가, 오히려 감옥의 존재로 인하여 그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여지를 가지지 않나 싶다.
공부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답답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10대 시절의 나는 '자유의 정체가 뭘까?' 생각해봤던 적이 있었다. (문사철 좋아했던 소녀였당께요?ㅋㅋ;; ) 지금보다도 쌓은 지식의 양이 더 적었던 그 때에도 얼핏 그런 생각은 했다 : "자유라는 것은 자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어보인다. 자유가 의미를 가지는 순간은 외부로부터 그 자유를 억압받는 순간밖에 없는 것같다." 10대 특유의 당차고 단정적인 표현이 못내 귀엽다. (응?ㅋ)
그 시절로부터 족히 20여 년은 지난 지금, 그 때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수긍되는 점이 있다. (...안녕? 과거의 나?) 하지만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그때와는 색깔이 사뭇 다르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사회의 규범이 개인을 침해하는 듯 또한 개인의 무언가를 지켜주는 듯 얽히고 섥힌 인연의 타래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떤 끈에 관심을 둘 것인지 선택할 수 있지 않던가.
누군가는 그런 선택조차 알게 모르게 사회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받아 그런 거라고 반문할 수 있다. 아 물론 인정한다. 누군가는 본인들의 가족이나 지역색, 기타 여러 직간접적 배경지식에 의해 사고의 '틀'에 갇혀버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내가 따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나보다!) 그렇다면 자유의 존재를 근원부터 의심하는 그대는 선택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가 반문하고 싶다. 그렇게 이끌려져 가는 삶을 산다면 뭐... 책임감은 덜 해서 좋은 것같기는 하다.
누명으로 인해 옥살이를 했던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도, 형을 구하기 위해 감옥으로 스스로 들어간 <프리즌 브레이크> 마이클 스코필드도 그들은 그들 삶에서 할 수 있는한의 '선택'을 했다. 엔디가 감옥에 잡혀들어간 그 순간에는 삶에 들이닥친 거대한 사건을 어찌할 수 없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앤디는 감옥조차 내 정신만은 가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는 어린 죄수를 가르치고 도서관을 확장하고 벗들에게 맥주를 나눠주고 오페라를 감옥안에 울려퍼지게 할 수 있었겠지. 물론 그 선택은 험난한 다음 단계를 거쳐야 함도 의미한다. 인생은 생각만치 무궁무진한 변수와 변수간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내 뇌가 계산할 수 있는 이상으로 변화하곤 하니까. 그렇게 스코필드가 똥고생을 했.... (읍읍)
보니까, 삶을 감옥으로 여기고 죽음을 감옥의 해방으로 여기는 관점도 있기는 하더라. 뭐 또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나 싶기는 한데,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그래서 삶을 마친 사람들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애도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럽게 맺음을 하는 경우는 열외로 치고, 그 나름대로는 여정의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끊어짐에 대한 남은 자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 슬픔을 알아주고 싶다.) 그 흐름을 받아들이고 보내드리는 것도 나의 '선택'이렸다.
그리고 감옥이라고 해서 '감옥'이라는 관념에 매몰되고 싶지도 않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저변을 넓혀나가며 살고 싶다. 그러다보면 <그린마일>의 그 흑인죄수처럼 기적적인 일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름을 모르겠어서 검색을 해 보니, 그의 이름은 '존 커피(John Coffey)'라고 한다) 외부의 억압을 몰아내는 데 집착하지 않는 자유, 내 선택의 저변을 키우는 자유라면... 있는 힘껏 그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겠다 싶으니 마음에도 든다. 그렇게 지금은 키보드로 내 자유를 뚱땅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