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리켜 선한가 또는 악한가...에 대한 견해는 이전 포스트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순서로, 사람들이 선에 대한 선망과 악에 대한 회피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 해 봤다.
사람들이 악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굉장히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군가가 악하면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 않던가. 내가 악하면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기 딱이지 않은가. (개인의 소중함과는 별개로) 개인과 개인이 엮이어 있는 이 세상에서 타인은 아주 효과적인 감옥이 되기도 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 내 이득을 챙기게 되면, 타인의 인지망에 걸리지 않으니 악한지 아닌지 판별을 못하게 되는데. 이는 악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럴 때에는 도덕적 절대주의가 등장 해 주심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들이 선한 것을 좋아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물론 내가 선하게 행동하면 내적만족, 사회적 인정, 이미지 개선 등등의 좋은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근데 이게 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 사람들은 꽤 적극적인 편같다. 그런데 반해 선한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은 꽤 자주 갈등하다 행동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길가에서 돈을 주었을 때 너무도 당연히 주인을 찾아주는 자도 있지만, 망설이는 자도 있다. 이미 알고 있기는 하다. 사람은 적당히 이기적이어도 다 살아간다는 걸. 되려 어떤 순간엔 좀 이기적이어야 손해보지 않는 듯하다는 감각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선(善)의 추구'가 마치 외모 지상주의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 모든 만물의 모양새는 그저 모양새일 뿐이다. 어느 모양새가 우월하다 또는 열등하다는 게 애당초 없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외모를 보았을 때 너무도 본능적으로 그리고 놀라울만큼 빠르게 그 사람의 외모를 '판단'한다. 그리고 '잘생겼다/예쁘다/귀엽다'고 판단이 들면 부지불식간에 호감(or ...무반응?)을 갖는다. 그만치 외모에 대한 판단은 꽤 중요한 어떤 사회적 시그널을 가지고 있지 않은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낳는다.
이런 생각은 해 봤다. 일단 잘생긴(혹은 예쁜) 남자/여자는 흔치 않다. 권력을 가진 자는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권력을 가진 남성은 예쁜 여자를, 권력을 가진 여성은 잘생긴 남자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때문에 외모는 본래 우열을 가릴 종류가 아니겠으나, 인간의 본능적인 권력추구는 외모에 어떠한 권능과 상징을 부여하게 된다. (이런 생각의 전개의 가장 기저에는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이 깔려있긴 하다. 이 부분만 건드려도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일단은 생략하도록 한다.)
내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더 많은 이쁜 뭔가를 가짐으로서 생존의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아 이건 못참지. 그래서 더욱더 외모지상주의가 되어간다. 그런 외모지상주의의 끝판왕이 미인대회가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는 'pageant(발음이 대충 '패젼'임)'이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미스코리아'라고 불리는 그것.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미스코리아의 진선미(眞善美)를 한자로 쓰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다.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도.... 가만보면 꽤 희소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 선한 행동이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추구하려 드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희소한 어떤 대상을 기꺼히 추구함으로써 본인 스스로의 권력을 확인해 가는 행동이 아닐까? 내가 뭐라도 더 낫기(better)에, 그만큼 권력을 가질법하기 때문에(deserve to attain power) 기꺼히 잘난 외모를 추구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과가 뒤섞여버린 전개가 있기는 한데, 역사가 반복되면 원인이 결과처럼 결과가 원인처럼 도치되거나 아예 동급 취급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 '완벽함'이라는 희소한 가치도 희소함 때문에 추구했을 뿐이나 이제는 완벽한 게 좋은 것처럼 취급당하는 사례처럼.
돌고돌아 권력과 생존을 논하고, 그 가운데 가치의 위계서열을 말하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조금 씁쓸한 느낌도 받기는 한다. 나는 세상만물의 동등성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에 마음이 끌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날고 기고 뛰고 뒹군다고 해도 내가 '인간'이라는 생물인 이상, 생존과 권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브런치를 열고 맨 처음 남겼던 글인 인본주의 vs 자연주의에는 모순적이고도 양립가능한 두 개념에 대한 내 자신의 항복이 포함되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해한 불교의 지향점은 대자유인(大自由人)이다. 만물에는 이렇다할 자성이 없다고 본다. 계열로 따지면 자연주의에 가깝다. 근데 불자는 이걸 대체 어떻게 극복하지? 불자도 사람이잖? 그냥 정신승리하고 끝? 그게 내가 지향하는 깨달음의 종착역일까? 붓다께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았다는 진정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디, 정등각, Nirvana, 열반)은 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나는 옥한흠 목사님 설교도 가끔 찾아듣는, 어쩌면 크리스쳔스러운 면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불자로서 남아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붓다께서 다다르셨다는 그 깨달음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궁금한 건 또 못참지!)
아 근데 궁금하긴 하다. 그 깨달음이 뭐였을까? 모른다고 해도 딱히 아쉬운 맘이 안 드는 걸 보니 내가 아직은 집착하고 있지는 않아서 다행. 아 그런데 궁금하긴 해ㅋ 같이 알아봐주실 파티원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