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주어는 '믿는다'라는 술어와 호응될 때가 많다. 그런데 막상 '종교인'으로 사는 내 삶을 돌아보건데 내 종교생활에 있어 '믿음'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같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불교를 믿으라'라고 말하는 것이 나는 못내 거북하다. 믿고 말고는 그의 몫이다. 내가 어떤 계기를 줄 수는 있는데, 그가 꼭 믿어야 하는 식으로 힘을 주는 일련의 행위가 일어날 때 망설임 역시 같이 일어나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길거리에서 물티슈와 전단지로 교회를 홍보하시는 분들이 아직도 나는 편하지는 않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불교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도반이 있다면 더할 수 없는 기쁨이겠다 싶어서, 스리슬쩍 권하게 된다.
종교를 한자어로 쓰면 따르다(follow)를 의미하는 종(從), 가르침을 뜻하는 교(敎)라고.......쓰는지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마루(= 끄트머리, 으뜸)를 의미하는 종(宗)의 종교였네. 그럼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지식과 새로이 안 지식을 적당히 믹스하여 '으뜸이 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일'정도로 해석을 해보고 싶다. (하하하! 글을 쓸 때가 되서야 알면 으쩌라고 ㅋㅋㅋㅋㅋ)
나에게 불교는 믿고 자시고 하는 차원의 대상이 아니다. 내 삶을 이끄는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자 살아가는 태도, 관점, 방편을 아우르는 말이다. 모든 것에는 이렇다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상황을 다면적으로 볼 줄 알고, 어떠한 현상은 인과관계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맥락에서 지금을 이해하고 앞으로 대응할지를 생각한다. 와중에 정견을 갖추기 위해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음을 내려놓으려 하고 끊임없이 계율을 따르고, 평정심을 추구하고, 지혜를 찾아나선다. 어쩌면 이슬람 율법이라는 게 알라의 말씀을 삶의 태도에 녹이고, 그 관점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삼기 위하여 샤리아(Sharia, شريعة)라는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주의 : 과잉해석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부분입니다. 종교에 대해 나만의 견해가 강하신 분들은 다른 글을 읽어주세요.
각 종교의 발원을 보면 왜 지금 그 종교가 그러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 유추할 여지가 보인다. (나는 요런 사고놀이가 참 재미있다.) 크리스트교의 경우에는 유대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성립하였다. 그래서 크리스트교의 경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나름대로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인 것이다. 유대교 특유의 유일신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예수라는 선지자가 깨달은 복음을 함께 전파했다. 게다가 서구사회 특유의 가족과 사랑을 중시하는 문화 덕분인지, 예수님 역시 사랑을 강조하셨던 영향인지 (뭐가 앞이고 뭐가 뒤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본주의가 핵심사상 중 하나인 서구문명은 의외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가족'이다. 그래서 신부님을 Father, 수녀님은 Sister라고 부르나 Bro?
불교는 기존 힌두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탄생했다. 힌두교에서는 사제/왕족/서민/노예라는 강력한 신분체계를 지지하고 전통적인 힌두 승려는 일반민의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영적인 수행에 전념했다. 하지만 불교는 진리의 상대성과 실체의 정해지지 않음을 주장했다. 별도로 유리된 승려의 삶 뿐만이 아니라 재가수행자(= 출가를 하지 않고 속세의 삶을 살면서도 깨달음에 이르려는 수행자) 길을 열어놓았다. 게다가 인도라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 대수학(代數學, algebra)이 발달한 나라 아닌가? 불교가 한창 융성하던 인도에서 논리철학과 수학이 역시 발달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롭다. 심지어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이 붓다TV에 등장하여 우주와 수학, 운동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유투브 영상도 있다는 걸 보면, 어쩌면 부처님은 F보다는 T이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 치열한 춘추전국시대에서 떠오른 도교와 유교. 도교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통찰하며 주창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얘기한 걸로 봐서 노자는 S보다는 N이실 것같고.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후학을 양성하고 선생을 자처한 공자는 N보다는 S이면서도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 싶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무슬림의 지도자는 적극적으로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특유의 문화가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AI는 무하메드의 MBTI가 ESTJ라고 짚던데, 공자선생님도 ESTJ라고 하더라. 그래서 두 지역권 모두 금전적 가치를 중요시 여기나? 그래서 한국이 이슬람교 지역에서 의외로 서로 윈윈하는 건가? (바라카 원전은 잘 쓰고 계시죠들?ㅋㅋ)
유발 하라리가 종교는 인간이 허구를 믿는 능력에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점이 꽤 타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리사 펠드먼 배럿이 주장하였듯이 인간은 그러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실제를 창조 해 내기도 한다. 크리스트교,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가 이 땅에 남긴 흔적은 결고 허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의 삶에 깊게 베여들어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것은 없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 물질세계와 관념의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존재이다. 물질세계는 공의 표현이며, 공은 물질세계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일테고 말이다.
아우~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니까 반야심경 땡긴다. 법륜스님이 해설 해 주시는 반야심경 강독 듣고 내용이 너무 좋아서 떨리고 설레기까지 했는데. 달리 불교의 제 1경전이 아니구나 싶었다. 수요법회에 참가하며 반야심경을 봉독하면 그 때의 그 설렘이 기억나기도 한다. 내 삶을 좀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원동력 중에 하나이기도 한 반야심경. 초기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소승불교 상관없이 제일 먼저 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터. 구관이 명관. 이참에 한 번 더 읽으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