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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도 루소도 모두 자연스러워

by 힙스터보살


노장사상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말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지 싶다. 또또 한자어 특유의 압축과 생략이 발동되어 저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 애매한게 못내 불만스럽다. 이러니 내가 뜻을 풀이할 수밖에 없지. 내가 이해한 무위자연은 '애써 무엇인가를 하려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일이 굴러간다'이다. 이러한 뜻에서 퍼지는 바이브(?)때문에 그런 것같은데, 노장사상의 이미지는 뭔가 유유자적하다. 세월아 네월아 하는 듯싶고, 혼자만 꿈속에 사는 듯한 태평함이 있다.


하지만 노장사상이 언제 등장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싶다. 무위자연을 주창한 장자 선생님도 공자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분이시다. 전국(戰國)이라는 말이 좀 고루하다면, '중국내전'은 좀 더 와닿는 말일까나? 대륙 전역이 전쟁으로 들끊고 무력과 계략이 난무하던 시대에 발생한 사상치고는 이질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고(思考)의 씨앗이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더라면 감히 '가(家)'라는 칭호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법가(法家), 유가(儒家)라는 말 모두 그 사상이 여러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기에 '가(家)'라고 이름붙여진 걸로 알고 있다.)


아니 근데 장자 선생님 혼자만 딴나라에 사셨나? 어찌하여 혼자만 그리 태평이신지? 아님 내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 건가? 전란에 휩싸인 시대를 살며 그는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애써 무엇인가를 하려들지 말라 한 것일까?


왼쪽이 장자 쓰앵님 같던데, 고생을 좀 많이 하신 듯(.....)


내가 이해한 무위자연의 핵심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추종'이다. 그렇다고 애굳이 '인위적인 것을 배격하자!!!'까지는 아니다. '뭘 또 그걸 인위적으로 하려들어~'수준의 바이브랄까? 약간 중용 특유의 니맛도 내맛도 아닌 고런 느낌을 살려서 받아들여 보자.


그렇다면 다시금 질문을 던져보자. '자연스럽다'는 건 어떨 때 하는 말일까? 나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발생하는 것을 가리켜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스럽다는 것을 '뭔가 하지 않아야'만 자연스럽다고 오해하는 것같다. 어떤 일이 발생하였을 때 '이건 어떻게 해결하지?'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일을 일시정지 시키고 '야야, 일은 자연스럽게 처리해야지, 그러니까 뭘 하려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는 것부터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마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자연스러움이 부재한 곳에 인위적임이 늘어나는 경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어둠의 부재가 빛인 것과 비슷하다. (김상욱 교수님이 빛을 설명하실 때 이리 말씀하셨다. 우주는 대부분이 어둡고 빛이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접근부터가 굉장히 납득가능했다.) 악이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라는 표현도 덩달아 생각나는데.


여튼 나는 '~해야 한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을 인위적이라고 치부할 것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때문에 자녀의 성교육에 있어서 청소년 시절에 되도록 자세하고 정확하게 성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교육을 지지하는 것도 납득이 가고, 성적 지식에 노출되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하여 최대한 늦게 알려주는 쪽을 지지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양쪽 모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나의 성교육 지향점은 이렇다. 아이가 성에 대해 알고자 하는 때가 도래하면, 그 호기심이 엉뚱한 데로 튀어나가기 재빨리 알아채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라이하게 알려주는 것. 아울러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는 게 적합한지 가이드를 전해주는 것.)


루소오빠 가만보면 꽤 잘생겼어... 헤어스타일 바꾸니까 바로 훈남 되벌이네잉?


지난번에 독서토론방에서 다뤘던 버틀란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책에서 루소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 루소는 그렇게도 유명한 <에밀>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나는 아직 <에밀>이라는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바로는 에밀에서 지향하는 교육관이 다음과 같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인위적으로 아이에게 지식을 주입하려 들지 말아라. 자연스러운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배우고 깨닫게 하라. 타고난 것이 자연히 발휘될 수 있도록 만들라. 아이가 가진 고유의 특징을 충분히 존중하고 그들의 욕구를 인정하라. 요즘 시대에 보면 '원래 저래야 하는 거 아니야?'싶지만, 적어도 루소가 <에밀>을 출판한 시대의 양육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나보다. 그렇게 혁신적이여서 그랬을까? 오후 3시 30분 산책강박자 칸트 선생께서 산책에 지각을 딱 두 번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에밀>을 읽다가 그래서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의 사상에 감명받은 후대의 교육철학자가 프뢰벨, 몬테소리라는데. 나는 이분들의 아동용 도서와 교구 이름으로 처음 알았다. 영유아들의 학습에 있어 발도로프와 쌍벽을 이루는 비싼 교구계의 탑티어가 몬테소리이다. 루쏘 슨생님은 애를 자연스럽게 키우라고 한 거 같은데, 어째 학습교구로 '몬테소리'라는 대명사가 이름을 날리는 게 아이러니. (아 이분들 그런 분들 아니라니깐요...??)


여튼 루소가 주창하는 자연주의 교육의 느낌은 장자가 지향하는 무위자연과 뭔가 비슷한 결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루소의 철학에 동의하는 점을 갖고 있다. 아이들은 비슷비슷 해 보이면서 또 자세히 뜯어보면 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질이 다르다는 게 입증되었다. 때문에 내가 내 아이에게 어떤 틀을 심어주려고 완력을 가하는 건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어떤 개입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는 한데, 되도록이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그 무엇인가가 여러 가지 계기로 온전히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면서 또한 효과도 좋은 교육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을 벗어나서도 그렇다. 뉴스로 대변되는 언론, 사람들이 만나서 논쟁하는 공론장은 언제나 '~해야 한다'는 말로 시끌벅적하다. (뭐 그게 민주주의니까~) 그 가운데 곧 죽어도 '~해야 한다, A는 B이다'에 생각에 집착하는 자들이 있다. 그건 진보로 평가받는 그룹이나 보수로 평가받는 그룹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이 '~해야한다'는 생각이 발현되는 그 순간의 자연스러움은 매우 인정. 하지만 그 생각이 현실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반박을 받을 때 가오 때문인지 고집 때문인지 주장은 드높이되 논리를 갖다대지 못하고 언성만 드높이는 건?그거야 말로 인위의 추구.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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