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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 고찰 : 정견(正道)

by 힙스터보살


불가에는 8정도(正道)라는 말이 있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그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사유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정당한 수단을 꾸려 생활하고, 꾸준히 정진하고, 마음을 다스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케 하고,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


탐진치를 극복하고 정견을 이루어낸 자의 눈빛은 어떠할까? 나도 그러한 눈빛을 갖고 싶다.


그 중 내 눈길을 끄는 단어는 정견(正見)이다. 정견의 뜻은 '바르게 본다'. 한국어는 '본다'는 단어가 하나이지만, 영미권에서 본다는 단어는 look과 see로 구분짓는다고 알고 있다. look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눈이 시지각신경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반면에, see는 look을 통해 인지된 외부의 대상이 내 안에 쌓인 어떤 배경과 결합하여 그 본질을 인지한다고 보면 되겠다. 전자는 물리적(physical)이라면 후자는 인지적(cognitive)이다. 정견(正見)이 가리키는 '본다'는 see와 가깝다고 나는 이해한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바르게 보지 못한다는 것과 대비된다. see의 특성상 내 안에 쌓인 배경이나 관점이 관여된다는 점 때문에, see가 온전치 못하게 동작하는 것은 내 안에서 작용하는 무엇인가가 인지를 방해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이미 정견(正道)방해하는 3가지 요소를 발견해 냈다 : 탐진치(貪嗔癡)


- 탐(貪) : 탐하는 마음, 무엇인가에 집작함으로써 생김

- 진(嗔) : 성내는 마음, '~해야 한다'는 게 좌절되면 생김 (이 또한 집착임)

- 치(癡) : 어리석음, 아는 게 없는 상태 or 잘못 아는 상태


여기서 내가 관심두는 것은 탐(貪)과 진(嗔)이다. 둘 다 집착함으로서 생긴다. 집착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기준을 정한다는 것과도 같겠다. 기준이 생겼기에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탐심이 생기고, 기준이 생겼기에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진노함이 생기는 것이다. 불가에서 내려놓음(下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탐(貪)과 진(嗔)에 빠지지 말게 하려는 수련의 일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이게 참 힘들다. 인간은 자연히 배고픔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먹고싶어하기에 다이어트가 힘든 것처럼, 인간은 자연히 욕망하는 존재기이게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자꾸 어떤 기준을 세워버린다. 이건 뭐 그냥 패씨브 스킬인 셈. 때문에 하심(下心) 수련은 본질적으로 억제기(limiter)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변형시킨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고. 어찌보면 좀 반인류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곁다리로 붙이는 말이지만, '내려놓음'에 성공한 인간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적절할지 문득 의문이 든다. 인간을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만든다고 바라봐야 할까? 욕망이 절제된 모습 역시 본래 인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형태로 인지해야 할까? 우주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기에... 인간이 우주와 합일되는 것으로 봐야할까? (맨 마지막 방식이 제일 끌리긴 한다.) // 이 부분은 최근에 새로이 생각이 든 부분이 있으니 추후 글에서 생각을 이어나가보고자 한다!


나 역시 내려놓음이 어려워 매번 부침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잘 내려놓을까? 내려놓는 것이기야 그냥 하면 되는 것이긴 하지만 (放下着), 그냥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와닿지 않았었드랬다. 그래서 방법적인 면을 찾다가 발견한 방법은 의외로 기독교 쪽에 있었다.


예전의 나는 교인들을 보면 마음에 드는 불편함이 있었다. '무엇이든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게 좀 싫었다. 그들의 행동은 인간이 인간 본연의 의지를 부정하고 수동적인 상태를 만든다는 것같아 보였다. 애써 유순한 양을 자처할 게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교인들이 달리 보인다. 그들이 행하는 '따르겠나이다'는 내 욕구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지향한다.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 그게 '내려놓음'이잖은가?


(불교) 좋고 싫음의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 (기독교) 그게 무엇이 되었든 하느님의 뜻일지니 따를지어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지향점이 동일하다. 결국 돌고돌아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길을 가고 있었던 셈. 뜻밖의 종교대통합! 따라서, 정견(正道)을 추구하려는 자는 응당 눈 앞의 상황에 순응할지어다. 순한 양이 되어 목자를 따를지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의 마음을 누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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