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바다 헤엄치기

by 힙스터보살


세상은 넓고 신기한 일은 역시나 많이 일어난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신기한 일은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날테지. 배우고 익히는 것을 놓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재미진 걸 보다가 갈 수 있겠다 싶으니 이 또한 즐거움이렸다!


이번에 접한 신기한 이야기는 타란튤라와 개구리의 공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쇼츠로 접한 이야기라서 혹시나 허위사실일까 싶어 따로 검색도 했다. 검색을 하다보니 매우 애정하는 응생물학 유튜부에서도 다룬 이야기였다. 어떤 이야기인지 풀어보자면.


덩치와 외형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거미, '타란튤라'를 들어보셨는지? 이 녀석은 굴에서 알을 낳고, 매복하여 사냥을 하는 습성이 있다. 더불어 시력이 안 좋다고 한다. 그런데 타란튤라가 사는 굴에 반려 맹꽁이가 함께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개구리과 동물이 타란튤라의 먹잇감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 뭔가 좋은 게 있어서 같이살테지? 살펴보니, 맹꽁이 입장에서는 꽤 안전한 집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타란튤라 입장에서는 알과 어린 거미에게 위협이 될만한 개미와 각종 해충들을 맹꽁이가 잡아먹어 어린 개체의 생존을 높혀준다고 한다.


그런데, 눈도 안 좋은 타란튤라는 반려맹꽁이를 어떻게 식별할까? 학자들이 추정하기로는 타란튤라가 맹꽁이 피부에서 분비하는 물질을 감지하여 그럴 거라고 보더라. 아니 또 그런데 타란튤라가 배라도 고파서 맹꽁이를 해치면 어떻게 하지? 맹꽁이는 타란튤라로부터 위협을 느끼면, 해당 타란튤라 밑으로 쏙 들어가서 숨는다고 한다. 덩치는 큰데 눈이 어두워서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이런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는 타란튤라 중 어떤 개체는 자신의 굴속에 최대 22마리의 반려 양서류도 키웠다고도 한다. 이러한 사례는 강자와 약자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서 공생을 이룩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슬며시 보여준다.


동물판 미녀와 야수 너낌...?


나는 문사철을 좋아하여 인문계 및 경영학과를 선택한 문과출신이건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이과스러운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그래서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연히 공학, 천문학, 자연과학 영상을 자주 추천한다. 특히나 요즘 여러 과학 커뮤니케이터 분들이 활약하시다보니 여러 과학분야에 걸쳐 나의 지식이 확장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타란튤라-맹꽁이 이야기도 얻어걸렸나보다. 과학이라는 장르는 깊숙히 알기에는 내 근본이 얕아 깊은 경지에 이르긴 어려워도, 교양으로서는 이만큼 재미를 가져다주는 것도 없지 싶다. 면면을 알면 알 수록 그 매력에 자꾸 빠져든다.


과학현상을 관찰하는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또한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는 자연을 이상향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자연관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인간이 본인의 '관점'을 투영하여 자연을 파악한다는 인상이 있다. 물론 관측자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관점을 버리고 본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성립하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알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려고 하는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사회의 다양성은 약간 인지적 부담으로 다가오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자연의 다양성은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나만 그런가?ㅋㅋ) 특히 생물학은 단적으로 진리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같다. 생물은 알면 알 수록 생존의 방식, 개체간의 관계를 맺는 방식, 습성 등등등 무궁무진한 다양함을 보여준다.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한다면 자연의 위대함 역시 마땅히 찬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한들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인간의 위대함이 구현되는 것은 자연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간 본위에서 인식한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 인간이 발견하는 그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임을 알면, 인간이 가진 오만함으로 인한 자기파괴는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뻣뻣한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겸손도 어쩌면... 고개를 숙일 '힘'을 길러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잘 익은 벼일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떠오른다. 어설프게 익은 벼가 고개를 빳빳히 들고 과도한 확신의 칼을 휘두르다 자칫 잘못하면 대참사가 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계 1,2차 대전같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같은...?) 나는 철학을 꽤 좋아하지만, 철학의 부산물인 '사상(思想, Ideology) '은 적용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상은 함부로 절대화해서는 안된다는 게 내 입장. 절대화를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이 관점의 한계를 알고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사고력(思考力)이 세상을 탐구하는 꽤 괜찮은 수단이라 하지만, 이 세상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메소드는 아니기에 겸양이 필요하다.


사상으로 정제된 생각은 이데아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순도 높은 원석을 잘 세공한 보석의 아름다움과 보는 것같은 홀림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공업용 다이아몬드도 필요하고 발전용 우라늄도, 송전용 구리도 필요한 법이다. 심미성에 심취하여 있는 그대로의 필요관계를 놓쳐서는 안된다. 자연에 대한 관찰도 그렇고 세상에 대한 관찰도 그렇다. 내 본위의 시각을 조금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이어지면 자연스럽게 겸손이 뒤따라 온다.


나는 여전히 아집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아 필요 이상의 자기확신에 차는 순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으래도 뭐라도 알고 탐구하려는 이 조그마한 노력 덕분에 가끔씩 겸손의 미덕이 나오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가장 큰 물을 품는다고 하던데. 탐구에 심취하고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더 베이면 내가 품을 수 있는 바다도 더 커지려나? ... 가보면 알겠지. 뜬금이지만 노래도 한 곡 듣고 싶다 - 패닉(Panic),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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