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를 보고 남기는 글입니다.
남치니가 남펴니로 전직하기 전에 우리는 집에서 참 이러저러한 영화를 많이 봤다. 아무래도 코로나 시기이다보니 집데이트가 자연스러웠던 탓이 제일 컸다. 남치니는 집돌이에 영화와 드라마 보기를 취미로 하는 자였다. (심지어 나는 영화와 드라마 보기가 시간낭비스러워서 잘 안 보는 사람이지만) 한창 연애호르몬이 팡팡 터지는 시기라 그런가 기꺼히 그 많은 시간을 영화와 드라마 보기에 할애했다. 내 입장에서는 '데이트', 그의 입장에서는 '생활의 공유'였던 연애시절이었다.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아이가 생겨버렸다. (와우~!) 그리고 우리는 거처를 지금의 이 도시로 옮겼다. 오랫동안 살던 도시를 떠난다는 점, 새로운 곳에서 아이를 키워내야한다는 빅 퀘스트를 받았다는 점에서 내 삶이 정신이 없었다. 오히려 정식 부부가 되기 전에, 예전에 함께 지낸 집에서의 기억이 더 알콩달콩하다. 그래서인지 예전 분위기가 문득 그리워질 때면 남편에게 영화를 보자고 한다. 그렇게 픽 한 영화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 조승연 작가의 추천작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아, '언젠가는 봐야지' 하다가 티빙에 있는 걸 보고 바로 재생을 시작 해 보았다.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좀 어질어질하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했다고 해도 말이다. 유려한 전개와 세련된 영상미에 익숙해진 뇌라 그런가, 이 영화 특유의 B급 감성이 뭍어나는 연출과 전개가 불편하리만큼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인 이상의 <오감도>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도 있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멀티버스의 세계는 상상력의 놀라움보다는 기괴함의 인지부조화로 다가왔다. 때문에 남편도 나도 꽤나 인내심을 발휘하며 영화를 쫓아갔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인내심을 발휘한 만큼 큰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일단 이 영화에서 악의 축으로 나오는 딸래미(조이)는 나름의 서사가 있다. 그녀는 어떤 우주에서 혹독한 훈련을 치른다. 그녀가 연마한 기술은 '버스점프'라는 것인데, 그녀의 엄마가 그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극한으로 몰아부치는 훈련을 감행한다. (약간 Asian mom meme이 있는 듯한 ㅎㅎ) 이 과정에서 그녀는 정신이 분열되고, 본의 아니게 그녀의 정신이 온 우주에 흩뿌려지게 된다. 덕분(?)에 세상에 유의미한 것들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괴적일 수준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존재나 규율의 무상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베이글에 빨려들어감으로서 우주적 허무를 끝내고 싶어한다. (ㅈㅅ에 대한 그럴싸한 은유이지 싶다.)
이전 우주에서는 엄마(에블린)는 자식을 혹독한 훈련에 몰아부쳤지만, 현생 우주에서는 엄마는 누구보다 딸의 안위를 걱정한다. 이 영화에서 엄마와 딸은 서로를 적대하는 관계였다가도 또한 가장 동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때문에 딸래미는 본인의 분열된 자아를 이해해줄 사람으로서 엄마를 찾고, 본인의 상태를 수용해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 걸로 보인다. 어쩌면 딸래미가 엄마와 함께 베이글로 함께 빨려들어가기를 제안하는 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엄마의 인정을 갈구하고 싶었던 행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쓰니까 딸래미가 꽤 불쌍 해 보이넹...!)
와중에 내 눈길이 가는 메시지가, 에블린이 본인의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깨닫게 해 준 메시지가, 남편 레이먼드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어... (중략) ...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여기잖아. 당신과 아버지는 내가 너무 착하고 무르다고 하였지만, 나 역시 투사고, 이게 내 투쟁 방식이야"
이 대사 이후로 에블린은 그녀의 모든 멀티버스에서 누군가를 돕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층 더 강해진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힘이 생기려면 돈이나 능력, 인맥같은 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힘의 원천은 생각보다 다양할 수 있다고. 걔중에는 나약함, 불완전함, 친절함과 같이 '힘'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이조차도 당신에게 힘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리가 일개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이 삶은, 달리 보면 충분히 대단한 힘을 내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면 당신은 꽤나 온전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에블린 역시 그녀의 딸처럼 정신이 분열하여 온 우주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녀는 딸처럼 무상함에 손을 놔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딸은 '의미란 순간적으로 의미있을 뿐'이라고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 순간이 의미있다'고 바라보았다.
이 우주는 관점에 따라서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고 또한 순간순간에 모든 의미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생 우주에서의 에블린은 조이를 안아줌으로서 둘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우주적인 관점으로 많은 존재와 규율이 무의미하지만, 또한 그 무의미함을 끌어안는 것은 의미부여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유의미함과 무의미함은 시시때때로 뒤엉켜 돌아간다. 어쩌면 이게 우주의 모습일런지도 모르지. 윤회의 블랙홀이랄까? (아이고~ 또 어디서 불교냄새 난다 그쵸 ^^...!)
돌고 도는 과정에서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윤회는 내가 특정지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작'이라 지정함에 시작이 성립한다. 여기야말로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시점이 아닐런지. 무의미한 우주에서 유의미한 빌드업이 동시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다. 양자역학스러운 혼란함이 조금은 다정하게 다가오는 기분도 든다. 덤으로 우리가 마음 속에 느끼는 어떤 특정한 가치, 비전, 의지, 행동이 허무주의에 먹히지 않는 어떤 보루가 생기는 듯하다.
그러니 만물(萬物)이 유전(流轉)한다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하다고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다. 만물이 변하는 덕분에, 어떤 대상의 실체가 없는 덕분에 나는 얼마든지 내 자유대로 선택을 하고 살아갈 여지가 생긴다. 아 그렇다고 막 남들에게 피해주고 살지는 말고. 적어도 사회규범 정도는 지키고 사는 성의는 필요하지 싶다. 성의를 표하는 김에 친절함에 정성을 들이면 더 좋겠고 말이다. 그렇게 내가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길 빈다. 일단 나 자신과 우리 가족부터 다정하게 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