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참 오랫동안 논쟁을 일으키는 질문이다. 어떤 분은 선함을 주장하고 어떤 분은 악함을 주장하며 어떤 분은 백지의 상태에서 선악에 물드는 거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이 질문부터 하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선하다고 또는 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악한가? 그럼 내 가족에게 위해를 가지고 있는 자을 막고자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악한 행위인가? 안락사는 악한가? 의학의 발달과 의사의 양심에 의해 죽지도 못하는 것을, 단지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가? 침략에 저항한 테러리스트들은 악한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에 철도를 건설한 제국주의자들 어쨌단 타국의 경제발전 이바지했으니 선하다고 볼 수 있는가?
적어도 어떤 '특정 행위'를 기준으로 선악을 논하는 것은 당초에 적합한 답을 내리는 방식이 아님을 잘 알겠다. 사살을 장려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살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도 어리석은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숨쉬듯 선과 악을 논한다. 실체가 없는 것을 논하는 인간의 능력 덕분인 걸까? 아니면 그 와중에 실체라고 볼만한 게 있는 걸까? 색즉시공(色卽是空)하면서도 공즉시색(空卽是色) 해서 그런 걸까?
어디서 줏어들은 얘긴데, 예전에 유럽 어딘가에서는 탐험이 완료되지 않은 어떤 미지의 영역에 들어서면 '저기 용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참 그럴싸한 은유이지 않나? 심지어 낭만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난 이 표현에서 어떤 힌트를 얻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선/악이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상태를 가리켜 '선하다' 또는 '악하다'라고 하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공리주의 지지자 특유의 감각을 발휘하였다. 가족을 해하려는 자를 제압하는 건, 강도를 제압함으로 인하여 내 가족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침략에 저항하여 총을 들었던 열사는, 침략자에게 독립의 의지를 어필함으로써 다수의 피식민자에 영감을 주고 독립국가를 수립하는데 초석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이 비록 폭력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그 행동의 촉발은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한 행위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정당한 목적에 입각한 폭력행사도 폭력행사이기에 인류의 법체계는 가급적 사적구제를 허용치 않는다. 하지만 그 법이 개개인을 지켜주지 못하거나 오히려 개인을 폭압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을 애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맹자 할부지가 등장하는 기분이네?ㅋㅋ) 오히려 기존의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가속화하여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도 해결방법 중에 하나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이것이 일반화되면 사회혼란을 가중시켜 사회적 효용 총량을 감소시킨다. 참으로 공리주의적이게도(?!) 제지를 하는 것이 제제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니 규제를 하는 게 좋다.
이쯤에서 '악법도 법이다'며 법체계는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을 할 법하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법은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을 붕괴하는 일은 함부로 해선은 안될 것이다. 왜? 법의 신뢰도 하락은 전체 사회의 효용을 떨어뜨릴 수도 있을테니. 다시 구축하는 데에도 큰 비용이 들테니.
그런데 나는 저 말의 뜻을 조금 다르게 해석 해보고 싶다. 애초에 악해지고자 만드는 법이라는 게 있는가? 악법이라는 말 자체는 태생적으로 형용모순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회에
악법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볼 수도 있지 않은가 : '법도 악해질 수 있다'
한국의 배임죄는 좀처럼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 죄목 중 하나이다. 덕분(?)에 많은 금융권 인사들이 힌 탕 크게 헤쳐먹고 감옥살이 조금 하다가 말년을 풍요롭게 보낸다. 정당방위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판경성향 때문에 악한이 내 가족을 위협해도 힘부로 제압할 수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부재로 인해 소비자를 등쳐먹는 악덕기업은 집초마냥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럼 이런 악법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하나같이 악법은 사회 구성원 다수의 복리증진을 저해한다. 그렇다면 '악'이 가리키는 바가 좀 더 분명해졌다 :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다수에게 피해를 입치는 것은 악에 가깝다."
이런 생각까지 해 봤다. 어쩌면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발명 해 낸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떤 현상에 대하여 본인이 느끼는 긍정감/부정감은 개인에게 소속된 감각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선하다/악하다'로 승격되면서 사회성을 띄게되면 해당 표현은 권력을 갖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위정자들이 이를 그냥 냅뒀을 리가. 그렇게 정치는 본인의 선함과 상대방의 악함을 어필하며 선전선동적인 면도 갖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선하다/악하다'는 참 편리한 표현이다. 엄밀한 정의 없이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표현이지 않은가. 지금 상황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 주절이 주절이 설명하여 청자의 진을 빼지도 않는다. 선악구분은 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둘 다 손쉽게 사용할 강한 동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은 선악구분의 맹점에 꾸준히 노출된다. 자칫 잘못하면 선악구분은 맥락에 의한 사고를 단 몇 마디의 말로 가려버린다. 달콤하고 기름진 식품을 몸이 좋아하는 것처럼, 많은 정보가 생략된 채로도 효용을 말휘하는 편의성을 인간은 본연히 추구하게 되어있나 보다. 그래서 선악구분은 '프레이밍'이라는 고급진 표현으로 업그레이드 되어 정치싸움에 활용되곤 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로마의 자선(Roman Charity)이다. 일단 그냥 들여다봤을 때 독자님들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생각할 시간을 3분 정도 가지시고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셨으면!) 웬 늙은 남자가 젊은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다는 게 자칫 혐오스럽진 않은가? 젊은 여인을 탐하는 경망스럽고 흉측한 노친네의 모습은 악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의 본래 의미가 악을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라 한다. 사실 이 그림은 여성의 극진한 효심과 희생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 한다. 어떠한 일로 감옥에 갇혀 굶어 죽을 뻔한 노인 시몬을, 그의 딸 페로가 젖을 물림으로써 연명하게 해 준다. 결국 당국도 그녀의 효심에 감동해 시몬을 풀어줬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이런 맥락 없이 작품을 선악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선악으로 현상계를 바라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도 인과적으로 흘러간다. 때문에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자들은 함부로 선악을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불도를 수행하고 싶은 자들은 그래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 함부로 선과 악을 논하는 것을 경계할지어다. 그 속에 어떤 욕망이 숨어있을지 모르니까. 함부로 따 먹었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