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특보 (Feat. 도태방지 보험료)

by 힙스터보살


어느 시대든 지역이든 유행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가채를 올리는 것이 유행이었고 엘리자베스 시대 때에는 이빨에 검은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어떤 현상이 유행이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 부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 대중의 레이더망에 감지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채는 사람 머리털을 모으고 가공해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기도 하였고, 신분과 권위까지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발탁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대때의 검은 이빨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설탕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설탕은 1파운드에 일반 노동자 일주일치 임금만큼 비쌌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설탕 한 봉지에 수십만원을 호가한 셈. 때문에 비싸디 비싼 설탕은 귀족이나 왕족정도가 되어야 풍족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이만큼 부유하다~'를 과시하고 싶은 자들이 뭐라도 거무튀튀한 것을 이에 바르며 유행이 된 셈.


하지만 지금에 들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머리에 높은 가채를 얹는 것을, 썩은 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에 다른 것들이 자리매김을 했다.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재력과 노동에 매진하지 않고 운동으로 나를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근육질 신체. 시간의 제약을 뒤로하고 해외 정도는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행스타그램까지. 소재만 바뀌었을 뿐 선망의 대상은 여전히 이 세계에서 핫스팟을 만들고 만다.


여왕님, 아~~ 해보세요.


유행은 다분히도 타인의 선망을 반영한다. 선망의 지향점을 먼저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적어도 집단 내에서 약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생존은 인간이 원핵생물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과제이다. 내가 강자의 포지션을 실제로 가져가든 가져갈 가능성을 보여주든 유행을 추종하는 행위는 생존의 입장에서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유행을 따름으로써 약자로 전락할 때의 두려움을 벗어날 여지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이 보험을 들 듯, 도태의 두려움이 유행을 융성케 한다.


이러한 유행은 시대와 지역별로 눈에 보이는 형식이 달라질지언정, 그 안에에는 꺼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 타오르고 있다. 욕망이라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쁠 것도 없지만, 우리가 그 욕망을 움켜쥐려 하고 휩쓸리는 순간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며 얻게 되는 체력상승에 개인적으로 만족하여 운동을 하는 데 역점을 둔 자와 다른 사람 보기에 이정도는 가꿔야 괜찮은 몸이지 않겠냐며 운동하는 자는 내부구조가 아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둘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비율로 뒤섞여 있을 수도 있다.


유행을 타인의 욕망을 쫓는 행위로 비하할 필요도 없고 좋게 정당화시킬 필요도 없다. 그저 유행일 뿐이다. 한 알에 4~5천원 씩하는 두쫀쿠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비쌈에도 불구하고 궁금해서 먹어보고 싶으면 먹어보는 거고 유행에 따라가고 싶지 않다면 안 먹으면 되는 거다. 광풍이 불듯 부는 유행에 내 아이가 먹어보고 싶다고 할 때, 부모로서 조금 고민이 들기도 할 것이다. 유행이라고 다 해줄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격도 상당히 비싼데 안 했으면..하는 마음도 들고, 남들 다 먹는 거라는데 내 아이만 못먹을 것도 없지! 하면서 사볼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비난할 바가 없어 보인다. (어찌하다 보니 이웃으로부터 두쫀쿠 두 알을 얻어먹어봤는데 맛있긴 하드라. 나도 만들어 볼까....ㅋ 근데 남편은 질색하며 싫어함 ^^;)


유행이 번져올 때 일단은 기다리고 관찰하는 여유 정도만 있어도 괜찮겠지 싶다.


외려 이런 생각이 더 든다. 불자로서 욕망을 내려놓느니 마느니, 내려 놓는 것마저 번뇌라고 힘들어하는데. 불자(佛子)도 사람새끼(子)인데. 과연 욕망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는 건가 모르겠다. 욕망이 들고 일어날 때 현재에 깨어있기 덕분으로 '아 또 내가 들끊는 욕망에 사로잡혔네' 정도는 캐치하며 살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죽어서야 벗어날텐데, 그렇다고 죽어서 욕망을 끊어내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욕구는 날씨와 같다. 언제는 좋은 날도 언제는 나쁜 날도 있다. 바다도 눈부신 윤슬을 머금는 평화로운 날이 있는가 반면에 거센 파도가 치는 날이 있는 것과 같이 내 인생이 흘러간다. 파도를 치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언젠가는 들이칠 파도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러저러한 대비를 하고 살 뿐이다. 파도에 집어삼켜지는 순간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게 삶인가 싶다. 그러고 보면 그냥 죽어서 끊어내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이긴 한 것같은데, 그럴 일 없다는 것마냥 열심히 사는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인 것같다. 내일은 또 어떤 날씨려나~ 기상특보는 아니길 빈다.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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