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에서 제임스 베리라는 사람의 일화를 알게 되었다. 가볍게 소개를 하자면, 그는 19세기에 활동한 영국 육군의 군의관이다. 그는 혁신적인 의술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책으로만 접했던 제왕절개를 파견지인 남아프리카에서 집도하였는데, 당시에 굉장히 드물게도 산모와 아기를 모두 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40여년 동안 의사로 지내다 70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흥미로운 건 그의 죽음 이후이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가 평생에 걸쳐 지켜온 비밀이 밝혀지는데, 그는 사실 '여성'이었다. 여성의 성별로는 의과대학을 가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남자인 것처럼 살아왔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7>가 생각났다. 유색인종만 쓸 수 있는 화장실이 사무실로부터 40분 거리라 소변을 한 번 보려면 1시간 20분 동안 자리를 지킬 수 없었던 캐서린. 왜 근무시간동안 자리비움이 기냐는 상사의 채근에 울분을 토하며 불편을 호소했다. 그의 상사는 빠루를 들고와서 유색인종 화장실 현판을 때려 뿌셔 부수고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날린다 :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여성과 흑인의 인권을 강조하면서, 그들 역시 소중한 사람이기에 성별과 인종에 얽매이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 게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근데 나는 되묻고 싶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과 별개로, 그들이 어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과연 그들의 권리를 찾는 그 결정적인 시점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사람을 도구이자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하지만, 인간은 시시때때로 인간을 도구로 대하곤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쟁과 학살, 인권유린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설명해 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에 가깝고, 욕구를 충족시킬 외부 환경의 이용에는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이유,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배제한다면, 자연히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전반적인 효용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단지 나의 '관점'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이득을 포기한다? 그럴 리 없지. 내가 아는 한 인간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을 도구화하는 관점이 안 좋은 쪽으로 강렬하게 작동한 사례 역시 있다. 나치 독일에서는 쓸모없는 존재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았던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여성과 흑인의 인권존중은 그들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았지만, 나치 독일식 접근은 그들에게는 절망적으로 좋지 않고 나에게만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뿐이겠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관점'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진다. 관점은 세상을 오롯이 포용하는 능력을 갖추기가 힘들다. 세상은 다면적이지만 관점은 일면적이기 십상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인간사에는 그러한 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서 나는 차별금지법을 주장하는 이들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위의 관점을 반영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있는 자들 중에 게이가 있다 쳤을 때, 그들을 차별한다 하여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반론의 여지도 생길 수 있다. 성소수자를 인정하여 기존 가족의 의미가 변색되게 하고 장애인의 노동권을 중시하면서 사회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괜찮겠냐고. 그렇게 '누가 더 피해를 입는가'를 경쟁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각기 다른 피해감각이 피해수치를 파악한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특정 영역의 억압비용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비용이 유의미하게 상승하고 피해감각이 이를 감지해내고, 조금 운좋게 어떠한 사건이 터져 여론의 시선을 모으면 변화의 문턱을 넘어가는 것이리.
아주 거시적으로 보면 결국 옳고 그른 것이란 없다. 어떤 주장이 옳다 혹은 그르다고 표현하는 건, 그 주장하는 바가 시대적 효용을 인정받았느냐 아니냐의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 때문에 각 분야의 소수자들이 인정받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 사회의 거시적인 가치에 플러스 효용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인의 모든 행동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필요가 있게끔 할 뿐이다. 적어도 '요즘'이라면 말이지.
여기에 AI라는 변수가 더해진다. AI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다. AI의 등장으로 인간은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효율의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이다. 인풋과 아웃풋 사이의 피드백 간격이 짧아진 만큼, 근로 시간에 투입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여유는 상당히 쪼그라질지도 모른다. 내 앞의 도구가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베테랑이던 자와 신입인 자 모두 평등하게 무력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효용의 극에 다다르게 되면 오히려 지적장애인의 존재가 오히려 인간의 고유성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역설의 완성!?)
변화하는 인간의 가치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문을 던진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이런 것들이다 : 어떤 상황에서 당신 머릿 속을 스치는 답은 당신의 경험과 관점에서 나온 편린의 하나이다. 소중한 한편으로 얼마든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함부로 그 답을 확신하지 말자. 버틀런드 러셀이 주장했던 것처럼 '판단을 유보하는 힘'을 갖자. 하나의 결정에 많은 고심이 뒤따라야 하는 시기가 된만큼 뇌는 많은 부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생각을 즐기지 않는 존재이기에, 당신은 포퓰리즘에 더욱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살피고 의심하고 생각하라. 주관을 갖되 주관에 흔들리지 말지어다.
이 모든 모순을 겸허히 수용하고 버텨 내 보자. 가다보면 내 가치를 만들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가치를 창조해 나가보자. 모르지... 먼 미래에는 AI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끝은 마주하는 시기가 올지도.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가며,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 최근에 일폭탄이 떨어져서 글만 남기고 이웃작가님 계신 곳에 가지를 못하네요. 여유를 되찾는대로 글 읽으러 다니겠습니다. 그으래도 매주 수요일마다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