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안 되는 내 친구에게 바치는 찬가
책상 앞에서의 시간이, 야외에서의 시간보다 긴 생활을 해왔던 사람이다 보니, 필기구에는 나름 나만의 까다로운 취향이 있다. 샤프펜슬에서, 유성 볼펜, 그리고 수성 볼펜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만년필에 정착했다. 약 7년의 공부 생활 동안 나를 거쳐 간 필기구는 많지만, 이렇게 오래 쓰고 있는 필기구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그냥 필기구 수집병에 걸려서 별 의미 없이 만년필을 사놓고는 처박아 뒀었다. 그러다 작년부터 주관식 시험 준비를 하게 되어 케케묵은 서랍에서 꺼내서 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써오다가 문득, 근 1년 간 내 파트너가 되어준 만년필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져 이렇게 글로 남긴다.
만년필을 첨단 기술이 넘쳐나는 21세기에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년필은 1800년대에 발명되었다고 한다. 거의 200년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긴 시간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언가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장점은 무엇일까? 순전히 내 주관적 경험에 근거해서 적어보겠다.
일단 손목이 편하다.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사는 내게 이것은 그 어떤 장점보다도 크게 와닿는다. 종이에 눌러야 글씨를 쓸 수 있는 연필이나 볼펜과 달리, 만년필은 종이와 닿는 순간부터 스스로 잉크를 뱉어낸다. 그렇기에 손목에 힘을 주지 않아도 글을 잘 쓸 수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이 정도 대가 없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그뿐이 아니다. 만년필은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써진다. 물론, 관리를 잘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관리만 잘해왔고, 흐름이 좋은 잉크를 쓴다면, 시험 중에 글씨가 갑자기 안 나오는 비상사태를 겪을 염려가 다른 필기구보다 훨씬 적다. 유성 볼펜을 쓰다가 갑자기 안 나와서 당황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만년필로 갈아타고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 자신도 믿기 힘든 시험장에서 믿을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이런 실용적인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년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사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쾌락. 사각사각 종이를 긁어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펜촉의 감각은 3일간 샤워하지 않은 몸을 긁는 것보다도 시원하고 그 어떤 버라이어티 쇼보다 유쾌하다. 그 쾌락과 중독성 때문에라도 뭐 하나라도 더 쓰려고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펜이 길들여져 더 맛있게 써진다. 이런 되먹임 속에서 나는 펜과 함께 연단(鍊鍛)되어 간다.
물론 나도 항상 만년필을 쓰는 것은 아니다. 잉크가 종이를 가리기도 하고, 일단 밖에서 들고 다니기엔 잃어버릴까 봐 무섭기도 해서다. 그렇지만, 만년필이 한 자루도 없는 사람이라면 나만의 만년필을 하나 장만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름 그대로, 만년 동안 내 파트너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 파트너가 나를 불러 대는 까닭에, 이 글을 교열할 시간도 없다. 그럼 여러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