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강원도 어느 높다란 산줄기 아래 세워진 아파트 단지 13층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답니다. 동그란 뿔테안경을 코끝에 걸친 열한 살 소녀 A는 도화지 위에 세상을 옮기는 걸 좋아했어요. 아빠의 낡은 구두 뒤축이나,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통학로, 그리고 가끔 시켜 먹는 매콤한 떡볶이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 같은 것들 말이에요. A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까먹는 과자가 맛있고, 미술학원에서 받은 칭찬 한마디가 기쁘고, 퇴근한 아빠의 품이 따뜻한, 집에서 그림만 그려 피부가 하얗고, 미소가 사랑스러운, 그런 아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시골의 투명한 파란 하늘 위로 거대한 은빛 우주선이 내려앉았어요. 거울같이 반짝이는 우주선은 한동안 그대로 떠 있기만 하더니 어느 날 지구의 모든 스피커를 빌려, 감정 없는 기계음으로 딱딱하게 읊조렸답니다.
“강원도 ○○군 ○○면 ○○아파트 101동 1301호. 11세 여성 A. 위 사람이 72시간 이내에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면 지구를 멸망시켜버리겠다. 이상.”
그 건조한 통보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장 잔인한 불씨를 심었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엔 “아이를 지켜야 해!”라고 소리쳤지만,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릴수록 마음속에 숨겨둔 괴물들을 한 마리씩 꺼냈답니다.
A가 사는 아파트 13층 복도는 금세 카메라와 정치인들로 가득 찼어요. 방송국 직원들이 각기 방송사 로고가 붙은, 대포같이 생긴 카메라를 A에게 들이밀었고, 정치인들은 가슴에 형형색색 리본을 달고는 카메라 앞에서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A의 손을 잡았지요. “A양, 자네가 결단하면 우리가 ‘A 평화 공원’을 건립하고 자네 이름을 역사에 새길 거야.” 하고요. 하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 밖에서 그들은 A의 부모에게 차갑게 말했답니다. “80억 명의 목숨이 당신들 딸 손에 달렸어. 부모라면 아이를 설득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 겁니까?”
평소 인사를 나누던 경비원 아저씨도, 옆집 아주머니도 이제는 엘리베이터에서 A의 부모를 만나면 고개를 돌리거나 낮게 혀를 찼어요. “저 동그란 안경 뒤로 우리를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다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우리 아들이 다음 달이면 스물인데, 불쌍해서 어떡해?"... 사람들은 저마다 아파트 13층 창문을 노려보며 평화로운 지구의 일상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올렸답니다.
드디어 약속된 72시간의 마지막이 다가왔어요. 전 세계 사람들은 눈을 감고 기다렸지요. A는 끝내 거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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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하늘 위의 우주선은 마치 인류의 추악한 민낯을 충분히 구경했다는 듯,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수직으로 솟구쳐 별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답니다. 지구는 살아남았고,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환호했지요. 하지만 그 다음 날부터 진짜 무서운 동화가 시작되었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제까지 A를 죽이려고 기도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그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지요. “결국 안 죽을 거면 진작 나갔어도 됐던 거잖아? 저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내가 3일 동안 손해본 돈만 얼마인줄 알아?" 하고는 사람들은 A를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이기적인 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학교에서도, 미술학원에서도 그 누구도 A를 이전처럼 대해주지 않았어요.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A와 제일 친했던 친구도, 미술학원 선생님도 옛날이랑은 많이 달라졌어요. 대답도 잘 안해주고,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그랬거든요. A는 절친과 주고받던 우정 일기장이 찢어진 채 자기 책상에 올려져 있던 걸 본 날 이후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만 있기로 했답니다. A의 부모님도 직장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다가, 결국에는 해고당해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직장을 구하게 되었답니다. 덕분에 A는 집에 자유롭게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달쯤 지나서, A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집어들고, 불지옥 맛의 떡볶이를 주문했어요. 그런데 왜인지 몇 번이고 주문이 취소되었고, 12번째 주문 버튼을 누르자 가게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집에는 배달 안 갑니다."
어쩔 수 없이 A는 다른 가게에 주소를 앞 집으로 해서 배달을 시켰고, 이윽고 배달이 도착했어요. A는 오랜만에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어요. A의 눈에 비친 광경은 뜯어진 벽의 페인트와, 지워지다 만 스프레이의 흔적, 말라 비틀어진 계란 껍데기같은 것들이었어요. A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새하얀 내복차림으로 후다닥 떡볶이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간신히 숨을 내쉬고 A는 쓸쓸히 초라한 만찬을, 입에 살포시 넣었어요. A는 안경에 맺히는 새하얀 김을 떡볶이 국물이 묻은 손가락으로 한참 닦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안경을 벗어 책상에 두고, 채 다 먹지도 못했는데 딱딱하게 식어버린 떡볶이를 흐려진 시선으로 한참 바라보았어요. 그러더니 오늘따라 별로 안 맵네, 하고 혼잣말을 내뱉고
...
A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마치 화단에 쏟아진 떡볶이 국물처럼 붉고 어지러웠어요.
세상은 다시 한번 요동쳤어요. 정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검은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 ‘A양 추모 특별법’을 통과시켰답니다. 수십억의 예산이 투입되어 거대한 ‘A 추모관’이 세워졌고, A의 얼굴을 본뜬 세련된 동상이 광장에 세워졌지요. 그곳에는 A가 생전 그렸던 그림들과, A의 반 친구들이 남긴 '보고싶어', '거기선 행복하게 살아', '천국에서도 교환일기 쓰자! 그동안 고마웠어' 따위의 편지들이 수십 장 전시되었죠. A의 같은 반 친구는 물론이고, A랑 본 적도 없는 다른 반 아이까지 A에게 편지를 남길 정도였다고 하니 아이들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가늠도 가지 않아요.
하지만 정작 아이를 잃고 무너진 부모님에게 돌아간 보상금은 겨우 ‘천만 원’뿐이었답니다. 아, 정확하게는 소득세와 지방세를 제하고 780만 원이 A의 부모님 통장에 찍힌 금액이었어요. A의 부모님은 그마저도 받는 것을 거부했지만, 나라에서 알아서 넣어버렸다고 해요. 참고로 나머지 예산은 모두 기념관의 대리석을 깎고, 정치인들의 홍보 영상을 만드는 데 쓰였답니다.
또 사람들은 이제 ○○면 사람들을 욕하기 시작했어요. “니네들이 A를 죽인 거야! 우리는 A를 사랑했는데, 저 미개한 니네들이 A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야!” 라면서요. 인터넷에는 A의 집에 찾아가서 희생을 종용하던 유튜버의 과거 가정사 논란부터, A의 집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던 아저씨의 고등학생 시절 치부까지 탈탈 털려 올라왔어요. "A 죽인 '그 당' 지지자 관상.jpg", "초등학생 죽이고 이제 와서 착한 척하는 유튜버 과거 논란"...등등의 글들이 인터넷 세상을 메웠어요.
니네가 죽인거야.
... 라고 말하듯 말이죠.
그렇게 ○○면은 ‘살인자들의 땅’이라는 두 번째 낙인을 달게 되었답니다. 사람들은 ○○면 사람들을 비난하며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려 애썼어요. “나는 그때 ○○ 사람들과 달랐어. 나는 아이의 슬픔에 공감했지.” 사실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13층 창문을 노려보던 공범이었으면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너는 나쁜 놈이고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끝없이 외쳐댔답니다.
A가 쓰던 동그란 뿔테안경은 이제 떡볶이 국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있는 상태 그대로 기념관 유리 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그 안경을 보며 또르륵 눈물을 흘리고는, '오늘 저녁 떡볶이나 먹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곤 해요.
외계인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외계인 말대로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