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세상의 변화란 것이,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저 자신을 비롯한 개인의 세상에 대한 변화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씨네필’이란 과분한 칭호를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단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세계가 영화 없이는 작동하지 않게 됐단 것을, 그로 인해 앞으로의 고생길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죠. 저는 어린 시절부터 변수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평범한 초∙중∙고교를 나와 대학도 문과생들이 가장 많이 간다는 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전공을 살려 세무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부모님의 뜻이기도 했죠. 그러던 저에게 그저 취미생활이던 영화가 인생 최대의 변수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저 자신조차도 몰랐던 것을요.
영화를 하고 싶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쓰고싶다. 다짐을 한 후 저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영화기자? 그걸 해서 뭐하는데?”부터 시작해 “영화는 그냥 취미로 보면 안 되는거야?”라는 물음들. 주변인들의 악의 없는 말이 고스란히 가시가 되어 마음에 박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 말들이 그토록 쓰리게 다가왔던 것은 단지 믿고 의지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서운함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당당히 답을 돌려줄 용기도, 준비도 갖고 있지 않은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시기에 우연히도 두 편의 영화를 만나게 됐습니다. <동주>와 <와즈다>라는 영화입니다.
만약 두 영화를 모두 본 독자라면, 의아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동주>와 <와즈다>가 함께 이야기될만한 영화인가?' 하는 의문 말이죠. 전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의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를 다루고 있고, 후자는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사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이 두 영화가 그 자체로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영화와 그 감상은 온전히 개인의 경험으로써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죠. 그렇기에 저는 이 글에서 지극히 사적인 <동주>와 <와즈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두 영화가 저의 세계, 나아가 그보다 큰 세계에 끼친 미미하고도 큰 영향에 대해 말이죠.
<동주>의 두 주인공은 한 집에서 자랐지만 서로 다른 면이 많습니다. 윤동주는 시를 꿈 꾸는 청년이지만, 송몽규는 자신의 신념이 가리키는 곳에 제 한 몸 바치고자 하는 행동파이죠. 극 초반엔 몽규의 "세상을 바꾸지 못할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니?"라는 물음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 하는 동주의 모습이 나옵니다. 저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아 마음 한 켠이 시려왔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르면서도 절친한 벗인 둘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합니다. 그 곳에서 송몽규가 문예지를 만들던 도중, 둘은 처음으로 갈등을 겪습니다. 자기 생각을 펼치기에는 산문이 더 적합하다며 시를 가급적 빼자는 몽규의 말에 동주는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갖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 세상을 바꾸는거라고." 라며 일갈합니다. 수동적이었던 동주가 처음으로 몽규에게 반발하는 이 장면은 극 초반 몽규의 질문에 대한 동주의 늦은 대답이기도 하죠. 그 자체로서 감동적인 대사이지만, 저에게는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적용되는 말로 다가와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한 편의 영화가 그 자체로서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작품이 한 사람의 마음에 일으키는 파동과 그 여파로 인한 변화를 믿는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야기가 우리와 이 세상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테니까요.
동주와 몽규의 갈등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와즈다>에서 소녀를 압박하는 것은 이슬람의 엄격한 율법입니다. 영화가 시작된 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햇볕 아래에 서 있는 벌을 받는 와즈다입니다. 이 소녀에게 닥칠 시련이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예감하게 되죠. 와즈다는 작은 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어보지만 거대하기만 한 태양은 가차 없이 햇볕을 내리쬡니다. 마치 소녀라고 봐 줄 생각 없다는 듯이 말이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이슬람 율법이 곧 태양이겠지요. 하지만 와즈다는 엄마의 만류와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겠다는 꿈을 이룹니다.
<와즈다>의 카메라는 이 과정에서 그저 담담히 소녀의 일상를 따라갑니다. 어떠한 가치판단이나 감상을 유도하지 않는 것이죠. “정직하고 투명한 창을 만들어 창 밖의 사람들이 사우디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의 시선은 공정하며 동시에 따뜻합니다. 또한 극중 등장하는 남성들조차 여성을 착취하는 악마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죠. 그럼으로써 이슬람 사회의 제도와 규율에 대해 보는 이들 스스로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만약 영화 속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나쁘게만 묘사되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고 지탄하는 것에서 그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성을 단순히 희생자나 동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 또한 <와즈다>가 지닌 큰 미덕이죠.
와즈다는 최선을 다해 코란을 공부해 결국에는 우승을 합니다. 자전거를 사서 타겠다는 이 소녀의 열망은 그렇게나 강했던 것이죠. 대체 자전거 타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꿈인지 묻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와즈다가 하고 싶었던 것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이미 와즈다는 압둘라의 자전거를 빌려 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죠. 소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압둘라가 와즈다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준다고 할 때의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경주는 어떻게 해?" 결국 와즈다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벌이는 친구와의 동등한 경주였을 테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인 <와즈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주인공들이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두바이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국내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금기시되던 여성의 자전거 타기가 허용됐다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이 자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잘 보여주죠. 물론 자전거 타기가 자유롭고 완전하게 허용된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구역 내에서, 그리고 남성의 동행 하에서와 같이 여전히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변화가 미약하고 아직 나아갈 길이 까마득하다고 해도, 작은 변화가 그보다 큰 변화를 가져오고, 마침내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을 믿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가 저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거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그보다는 <동주>를 보고 내 스스로에게 가졌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고, <와즈다>로 인해 이야기가 갖는 힘을 알게 되고 또 믿게 됐다고 해야겠지요. 그렇기에 이제 저는 그동안 맞닥뜨렸지만 답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물음들에 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고, 그것이 세상에 가져다 줄 변화를 응원한다고.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진 좋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