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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ludenshomo May 30. 2016

<프랭크>

자의식 과잉을 뺀 현실판 비긴 어게인

 요새는 왓챠플레이에 접속해 드르륵 드르륵 영화 목록을 훑어보는게 새로운 습관이 됐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항상 나의 시선이 한동안 붙들려 있는 곳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괴상한 탈이 초록색 배경을 바탕으로 내 왼쪽 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썸네일.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압도적인 비쥬얼. 그렇게 나는 <프랭크>와 만나게 됐다.


 영화는 바다를 보고 있는 '존'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도를 향해 "내게 무엇을 가져올래? 어디로 데려갈래?" 라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 그리고 길을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대로,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곡을 만드는 존. 그런데 마치 그 노래에 대답하기라도 하는듯, 얼마 후 그는 같은 곳에서 얼떨결에 항상 꿈꿔왔던 기회를 갖게 된다. 오늘 밤 공연 예정인 밴드의 임시멤버로 들어가게 된 것. 그리고 존은 처음으로 '프랭크'와 만나게 된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탈을 항상 쓰고 다니는 프랭크.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얕잡아봐선 안 되는 것이, 프랭크는 밴드의 중심이자 멤버들 모두가 입을 모아 천재라고 (음악적 면에서는)칭송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존' 역을 맡은 배우 돔놀 글리슨


 그렇게 존은 얼떨결에 밴드에 합류해 함께 앨범을 녹음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곡을 쓰는 일에도 몰두하는데, 결과는 늘 그래왔듯이 형편 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더욱 비참한 것은 그 '형편 없음'의 증명이 다른 멤버들의 입을 통해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초반부터 어렴풋이 예감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버리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존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되는 현상 말이다. 존은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일상을 SNS에 특별하다는 듯 기록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작품에 은근한 기대를 품었으나 타인의 평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가면 쓴 천재를 동경하면서도 그 가면을 벗겨보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평범한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오히려 너무 같아서 보는 이의 가슴을 뜨끔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역시 예술이란 특별한 '프랭크'에게만 허용되는, 평범한 '존'은 꿈도 못 꿀 영역인가?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물론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작품의 미덕이며, 여타의 '재능은 있지만 유명하지않은 독립예술가들'을 다룬 많은 영화들과 <프랭크>와의 차별점이다. 다른 작품들이 주로 취하는 선택은 바로 주류 셰계로의 편입이다. 상업적으로든, 비평적으로든 성공을 거두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들의 환한 미래를 축하해주며 극장을 나서지만 마음 한 편의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저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이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나 혼자만의 진정성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체험했고, 또 현재진행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솔직하다. 현실은 우리의 주인공인 프랭크에게도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천재뮤지션은 수많은 청중들을 갈망한다. 예술가랍시고 "난 나만의 길을 가면 돼." 하는 자만이나 자의식과잉으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성공을 이뤄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 불편함을 끼얹는 장면 따윈 없다. 이 점에서 <프랭크>는 같은 해 한 달 먼저 개봉해 흥행 성과를 올린 <비긴 어게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프랭크의 의지만큼 모든 것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밴드는 와해되고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는다. <프랭크>가 아쉬움의 눈길을 받게 되는 건 바로 이 지점부터이다. 엔딩을 향해 가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중반까지의 신선함과 패기를 그대로 이끌어가진 못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랭크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의 개인사가 부모님의 입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그동안의 활력을 잃고 이야기는 결국 다소 평범해보이는 종반부를 선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놀라운 것은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이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고운 몸선을 뽐내며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그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미어지게 하겠다는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연기한다. 그리고 그 작정은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단언컨대 마이클 패스벤더는 어딘가가 어긋나 있는, 그런데 그 어긋남이 묘하게 섹시하고 동시에 모성애까지 자극해 안아주고 싶은 캐릭터를 현존하는 배우 중 가장 잘 소화하는 배우이다. 그리고 이 작품 속 프랭크 또한 그런 인물들 중 하나이다. 세상 모든 사소하고 볼품없는 것들을 사랑해 노래한 프랭크지만 세상 모두가 그를 사랑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런 세상을 향해 노래한다. I Love You All.                                    


나는 '프랭크'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이 글은 저의 네이버 블로그 '뭐라도 되겠지'(blog.naver.com/hiceo1014)에 게시된 글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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