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폼므라 <콜드룸> (201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 2021)
필자는 '2021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의 감동을 한번 더 나누고자 본고를 작성한다. LG아트센터의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 할 수 있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37
본고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햄릿>에 이어, 조엘 폼므라(Joël Pommerat) 작/연출 <콜드룸>(My Cold Room)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특히 <콜드룸> 속에 나타난 '연극하기'와 우리의 '연극하기'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본 공연은 본래 2011년 프랑스 ‘오데옹 극장’(Odéon-Théâtre)에서 촬영되었다. ‘어둠’이 연출 의도라는 점을 관객에게 상기시키며 공연이 시작된다. 짙은 어둠이 깔린 수녀원에 찾아간 ‘에스텔’역의 루스 올라이졸라(Ruth Olaizola)는 만나는 수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수녀가 되고 싶어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대 뿐이다. 결국 에스텔은 수녀가 되지 못한다.
에스텔이 일상으로 돌아와 변기를 닦는데, 변기 안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이내 에스텔의 꿈 이야기가 펼쳐진다. 공연은 에스텔에 대해 ‘3인칭 나래이션’을 개입하며 진행된다. 나래이션을 통해 에스텔은 자신이 근무하는 상점, 동료에 대한 꿈을 많이 꾸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스텔만이 중국인 동료 ‘시두옹’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상점에는 냉장실이 있다. 냉장실에는 한 직원이 덜덜 떨고 있다. 사장 ‘블로크’는 냉장실이 더러워진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그리고 “상점에서 가장 보기 흉한 사람”이라며 에스텔의 옷차림을 지적한다. 또한 에스텔이 오랫동안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에스텔은 이상하고 불편한 낌새를 보이지만, 그러한 까탈스러운 사장을 가장 두둔하는 직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원들은 에스텔과 사장의 사이를 의심한다. 에스텔의 남편이 등장한다. 그는 겉으로 아주 젠틀해 보인다. 그래서 사장과 비교되어 보인다. 하지만 나레이션은 말한다.
“에스텔은 뭔가 아름다운 걸 가지고 있고,
블로크는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걸 가지고있다.”
어느날 사장 블로크에게 전화가 온다. 그는 전화를 끊는다. “내가 죽을 거란 말을 들었어요.” 중국인 직원이 무어라 말하는데, 그 의미는 “대단한 농담을 한 것 같다.”는 뜻이었다. 에스텔은 블로크에게 말을 걸며 장면이 전환된다. 블로크는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들을 모아 놓고 계약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직원 각자의 이름을 서명하게 하고 블로크가 운영하던 도살장, 시멘트 공장, 바(Bar), 등 블로크 재산을 모두 공평하게 소유하도록 한다. 사회의 평범한 노동자 계급인 직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한다. 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하다가 갑작스레 공동사장이 될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사실 시두옹은 프랑스어를 하는데, 남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에스텔만이 유일하기 그의 말을 알아듣고 대변해준다. 시두옹은 “가족이 있는데 왜 이렇게 하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러자 블로크는 ‘가족이 재산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법’에 대해 언급하며 그동안 표현하지 않았던 상점직원들에게 갖고 있던 애정이 시종일관 시니컬한 면모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를 언급한다. 자신에게 어떻게 감사인사를 할지에 대한 것이다. 그는 매년마다 재산을 줬던 사람(자신에게) 어떻게 하루를 내어줄지에 대해 상점직원들이 결정해보기를 원했다. 에스텔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극’을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직원들이 진지하게 연극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점 직원들은 사색이 된다. 그러나 결국 ‘그 하루’를 ‘연극’으로 내어주는 조건에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상점직원들은 에스텔에 대해 여간 불편한 기색이 아니다. 직원들끼리 모여 회의를 한다. 이사장을 뽑는다. ‘장 피에르’와 시두옹, ‘알랭’이 지원한다. 결국 알랭이 이사로 선정된다.
장면은 빠르게 바뀌고, 에스텔은 귀가 중 자신의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 남자’를 만난다. 그와 대화를 해보는데, 그는 정화센터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에스텔은 집에 들어가고, 이웃 남자는 그녀의 집에서 부부싸움 하는 소리,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를 듣는다. 일주일 후, 블로크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 뇌수술을 받았고,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상점에서 에스텔은 블로크의 수첩을 가지고 있다. 직원 ‘클로디’가 음악을 틀어달라고 한다. 클로디는 직원들과의 대화는 뒷전으로 하고 혼자서 춤을 춘다. 다른 직원들 또한 지금 펼쳐지는 상황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장면은 또 다시 빠르게 바뀌고, 알랭이 도살장에 간다. 도살장 직원들은 알랭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거친 요구를 한다. 또 직원 ‘장’은 바(Bar)에 간다. 그런데 그 바는 기실 매춘바이다. 이런 상황에서 알랭과 장은 완전 넉다운(Knock-down)이 되어 상점에 돌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고 한 에스텔에 대한 온 직원들의 분노가 쏟아진다. 그 자리에 시두옹은 없었다. 에스텔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울면서 집으로 간 에스텔은 남편의 폭언에 다시 시달린다. 나래이션은 ‘에스텔의 일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에스텔의 일기장엔 많은 게 적힌다. 에스텔의 꿈─정화, 물─에 대한 것들이 세세히 적히기 시작된다. 에스텔의 내면 한 구석에는 무언가를 강렬히 씻어내고자 하는 갈망, 카타르시스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이다.
장은 매춘바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완전 불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영에 대해 일자무식한 장과 다른 직원들은 도살장, 바, 상점운영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돌리고 있을 수 없었다. 이 때, 에스텔이 등장한다. 직원들은 에스텔에게 사과한다. 그러나 단 한 명, ‘클로디’만 사과하지 않는다. 에스텔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꿈에서 모두들 깨끗한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직원들은 다시 화를 낸다. 현실에서는 상점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들의 눈에는 에스텔이 비현실적인 생각에만 꽂혀 악취나는 똥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심경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상점을 제대로 경영할 사람이 없어서 직원들이 굉장히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8일 안에 인수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 그 조건으로 블로크에게 보여줄 ‘연극’이 필요하다. 연극을 준비해야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상점을 인수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곧바로 실직자가 되고, 사장이 되는 기회마저 놓치는 또다른 생계의 문제에 놓인다. 에스텔은 직원들에게 연극을 설득한다. 하지만 생계의 문제 앞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한 에스텔의 말이 먹힐 리 없었다.
“연극은 평상시에 못 본 걸 보게 해준다.”
필자는, 이렇게 공연이 전개되는 가운데 중국인 직원 시두옹의 존재에 강렬한 인상을 가졌다. 작가는 왜 프랑스 사회의 소수자로서, 소통 불가능한 존재인 시두옹을 심어두었을까? 에스텔의 말대로 “평상시에 못 본 걸 보게 해주는” 연극에서 대한민국 관객인 우리는 중국인 이민자 시두옹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에스텔만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지나쳤던 존재를 누군가는 포착하고 그 삶과 언어를 중간에서 매개하며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귀 기울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런 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에스텔은 대체 왜 연극으로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할까? 이 질문은 직원들의 질문과도 일치한다.
장면이 바뀌고, 장은 일찍이 어두운 출근길에 상점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상점 안에 어떤 사람이 총을 들고 있다. 그는 분노에 차올라 있으며, 복종하지 않으면 곧 총을 쏠 기세로 장에게 말 타는 시늉을 시킨다. 그는 ‘에스텔의 남동생’이었다. 직원들이 알기론 에스텔에겐 아홉 명의 남동생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망가져 있는 상태다. 특히 그 남동생은 살인자다. 겁에 질린 장은 에스텔에게 사과를 하고 만다.
남동생의 협박 소동으로 인해 직원들은 바짝 군기가 들었으며, 에스텔의 총지휘 하에 연극 연습에 돌입한다. 시두옹은 블로크 역을 맡았는데 그의 대사를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고 에스텔은 연습을 하는 동안엔 현실의 문제인 ‘상점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사실 에스텔은 남동생으로 분장한 것이다. 블로크를 위해, 연극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위해, 직원들의 변화를 위해 자기 자신을 극적으로 연출시키며 어떻게든 연습을 이끌어내야 하겠다는 에스텔의 의지가 연극적으로 피어난 대목이다. 에스텔은 시두옹에게는 프랑스어 공부를 시키기도 한다. 기실 프랑스는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나라로 유명하다. 그러한 나라에서 외국인이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았음은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기 쉽상이다. 시두옹은 이민 초기가 아님에도 왜 프랑스어를 공부할 의지가 없었을까? 어쩌면, 동양인으로서, 서민층으로서, 서구 국가에서 받는 혹독한 시련으로 인해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시두옹은 연극을 동기삼아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한다. 시두옹에게도 작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극 참여로의 의지, 소통의 의지, 나아가 다른 사회로의 정착 의지 즉, ‘삶의 의지’로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점은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한다. 장이 일주일 전부터 출근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매춘바 감독일 이후 장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장 없이 직원들이 모였다. 상점의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 이 때, 에스텔의 남동생을 부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상점은 일요일에도 문을 열며 열심히 운영에 돌입한다. 프랑스 사회에서 일요일에도 일을 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와 완전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느 날은 알랭이 도살장에 다녀와 그곳 직원들에게 맞아 머리를 다쳤다. 알랭은 경영난으로 도살장 문을 닫게 될 수 있다고 통보를 하고, 설상가상 보상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해서 성난 직원들이 몹시 격분하였기 때문이다.
에스텔의 연극에 대한 꿈이 펼쳐진다. 에스텔은 이것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곰, 부리새, 가수가 등장해 오르골처럼 아름답게 빛을 받으며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배우에 재능이 없는 상점직원들의 의도치 않은 코미디 난장판일 뿐이다. 이 장면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을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에스텔에게도 변화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신경쇠약’이다. 연극을 기다리는 블로크는 병원에서 협박편지까지 보내기 시작한다. 직원들이 언제 블로크에게 갈 것인가? 결국 에스텔이 블로크에게 찾아간다. 대신, 남동생으로 변장을 해서 간다. 라디오를 끼고 음악을 틀고 블로크 앞에 등장한다. 그들의 첫 만남이다 몸에 기운이 없는 블로크는 여전히 연극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블로크는 남동생을 통해 진실한 웃음을 내비친다. 죽음 앞에서 웃을 수 있었던 블로크는 그렇게 남동생과 유대감을 쌓는다.
사실 에스텔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을 뿐이다. 아래로 남동생이 아홉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에스텔은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남자와 또 마주치는데, 이웃남자는 그녀의 남편 소리를 또 듣는다. 에스텔은 다투고나서 평상시보다 더 꿈을 강하게 꾼다. 장면은 다시한번 빠르게 바뀐다. 이것은 에스텔의 꿈으로 보인다. 블로크는 휠체어에 앉아있고, 블로크 앞에서 인형탈극이 벌어진다. 무대는 원형의 회전무대로 바뀌어 빙글빙글 돌아간다. 마치 레코드판이 돌아가듯 빠르게 감긴다.
<콜드룸>의 장면전환의 템포는 속도감이 넘친다. 이번에는 상점의 냉장실로 공간이 바뀐다. 시드옹은 냉장실에 에스텔의 남편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다. 곧바로 장면이 취조실로 바뀐다. 용의자로 에스텔의 남동생을 의심한다. 타인을 변화시키고 싶고, 자신을 더 잘 보고 싶어하는 에스텔의 욕구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이 모든 게 ‘사랑’때문에 변했다는 에스텔은 자기 자신을 정작 잘 돌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빛이 되어주고 싶은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수녀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았을까? 성직자는 항상 자신의 내면을 신의 이름을 빌어 묵상하며, 세상 밖으로는 신의 이름 아래에서 희생하고 봉사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랬던 게 아닐까. 비록 성직자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로크의 병상에서 에스텔이 서있다. 결국 직원들과 선보일 연극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을 한다. 연극은 없을 거란 말과 함께, 그러나 자신의 남동생에 대해 말해준다. “여기로 오라 하면 되죠?” 블로크는 그를 보고싶어 한다. 이내 에스텔은 남동생으로 변장을 해 블로크 앞에 등장한다. 직원들끼리 단합되어 연극을 펼치는데 실패했어도, 에스텔은 블로크를 위한 진실된 삶의 연극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블로크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그게 뭔지 몰라 죽을 거라는 말을 한다. 블로크는 자신의 변화를 느낀다. “난 변하고 있다.” 블로크는 에스텔의 방문 후 눈을 감았다.
수도자들이 흰 옷을 입고 엄숙하게 기도중이다. 이 때, 에스텔의 남동생이 왔다. 수도자들에게 쫓겨난다. 결국 에스텔은 변장을 벗고 길을 나선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5년 전에 상점은 팔렸고, 시세월이 지나 시두옹 덕분에 같은 곳에 직원들이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에스텔을 만나지 못했다. 에스텔이 돌아왔다. 클로디는 그녀에게 사과한다. 에스텔은 홀연이 떠났다.
<콜드룸>은 막바지에 치닫는다. 성당에서 에스텔은 이웃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정화센터에 다니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청부살인업자로서 에스텔의 남편을 죽인 범인이었다. 명령 없이 개인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에스텔을 만남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는 걸 털어놓게 되었다. 나레이션은 에스텔의 마지막 이야기를 읊조려준다. “에스텔은 다시 직장을 구했다. 사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이 사람의 어두움은 비교 불가능하다.” 에스텔은 새 직장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청소머신을 타며 자유롭게 뱅글뱅글 돈다. 원형의 회전무대와 함께 돌며, 에스텔에게도 어떠한 깨달음의 변화가 찾아온 듯하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악을 몹시 사랑하는 걸 수도 있어요.”
<콜드룸>은 연극적인 연극이다. 연극을 통해 어떻게 한 개인과 집단이 변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에스텔은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만을 보는 시선에서 놓치고 있는 작은 것들을 보는 시선으로, 웃음 없던 삶에서 삶의 막바지에 웃음을 찾은 삶으로, 규칙대로 살아오던 삶에서 규칙을 깨는 삶으로, 무엇보다 그리고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찾지 못했던 내면의 깨달음을 찾았다. 공연은 대부분의 장면이 시종일관 어둠이 짙게 깔린 채로 진행된다. 그러면서 다양한 고보(Gobo) 조명을 활용하여 장소의 분위기를 설정해주고, 영화가 해낼 수 있는 빠른 커팅감으로 장면을 전환한다. 특히나 어두운 세상 속 한줄기 빛과 같은─저마다 삶 속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연극의 힘을 에스텔이라는 여인의 아름다운 내면을 통해 이끌어낸다. 꿈속에서 본 표현 불가능한 아름다움들을 비록 현실에선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에스텔의 내면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것들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은 에스텔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인간 저마다의 심연에 존재한다. 어둡고, 힘겨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본 공연은 재고한다.
<콜드룸>은 에스텔의 연극적 꿈과 현실을 리듬감 있게 교차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연극화되었을 때 발생되는 변화를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장면전환의 점(point)은 짧지만, 인물들의 변화의 과정은 길다. 그리고 <콜드룸> 속의 이 모든 연극을 벌이게 한 원동력은 ‘사랑’에 있었다는 점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준 연극의 가치에 대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해준다.
lgartsenter, <<콜드룸> - 환상과 은유의 대가가 그리는 내면의 몽타주>, LG아트센터 네이버블로그, 2021-04-01, https://blog.naver.com/lgartscenter/222295097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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