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를 중심으
브레히트의 접촉(Die Berührung von Brecht)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 창출을 위한 연출과 연기술 연구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심으로->를 중심으로 -
필자: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관극일시: 2021-07-22 (목) 오후 8시
장소: 뚝섬 플레이스
본 공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 창출을 위한 연출과 연기술 연구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심으로->(이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는 제 20회 변방연극제를 거쳐, 그 연장선상으로 7월 25일까지 공연을 선보인다. 변방연극제가 끝나도 자신들의 둥지로부터 실험 연극의 창공을 날아오르고 있는 성북동비둘기는[1] 과연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거리두기 즉, 생소화 효과(Verfremdungseffekt)를 통해 어떻게 관객으로 하여금 동시대의 코로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하였을까?
박보현 배우의 진행에 따라 관객이 입장을 시작한다. 박보현은 관객을 한 명씩 무대 입구 앞에서 대기를 시킨다. “1번 관객님 입장하십니다!” 무대 위에 거리두기를 한 채 앉아있는 10명 남짓의 배우들은 격렬한 박수와 호응을 보내고, 관객이 객석으로 이동된다. 관객 중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즐거운 순간이고, 누군가에겐 황당한 순간이다. 즐거움과 황당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 순간에서 그러나, 거리두기를 활용한 박보현의 진행으로 인해, 이 순간 ‘내가 관객이구나’를 철저히 인지할 수 있는 극장 안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창발된다.
이렇게 입장부터 쌩뚱맞고, 생소한 경험으로 시작해서, 본 공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는 브레히트에 대한 논문의 제목과 같이 장면 구성도 예를 들어, ‘<목차>, 1. 서론 2. 가면의 사용 3. 경극의 영향…’으로 칠판 위에 나열되어 있다. 기실 브레히트는 연극, 영화, 독문학 등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를 모르는 관객에게는 브레히트라는 존재 만으로도 벌써부터 성북동에서부터 성수동까지의 거리감을 창출한다. 게다가, 그들은 브레히트는 독일의 극작가라는 작은 정보 정도를 가졌을 텐데—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에 독일-동아시아를 아우르는 8000km의 연극 실험의 여정을 한 듯[2]—어떻게 경극(京劇, Pecking Oepera)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노(能)는 또 무엇이며 등 칠판 위에 빼곡히 적힌 학술적 용어들로 인해 온통 생소함으로 가득 차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관객들은 본 공연의 리플렛에 씌여진 ‘거리두기’(브레히트와 관련된), ‘게스투스’, ‘서사극’과 같은 단어와, 논문을 본뜬 제목에 의해 ‘왠지 브레히트에 대해 공부를 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공연이 아닐까?’’라는 공연과 자신 사이의 일종의 ‘거리감’을 이미 가지게 되고, 그리고 그 ‘거리감’이 호기심이 되어 객석으로 향하게 될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본 공연은 투명 비닐막—정신적으로 존재하며, 이론으로 정립되었기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행위자와 관람자 사이의 무언의 약속 즉, 행위자는 무대 위의 세계에 존재하며 그 세계에 철저히 몰입되겠다는 약속의 ‘제 4의 벽’(the 4th wall)—을 의도적으로 설치하여 진행된다. 그러나, 본 공연은 무대와 객석의 철저한 분리를 지향하는 게 아님을 주지한다. 본 공연은 육안으로 보이는 제 4의 벽(비닐막)을 통해 첫째, 동시대 펜데믹(pandemic) 상황에서 행위자와 관객 모두의 안전 지향 둘째, 벽(겹)을 노출함으로서 “이것은 노골적으로 연극이다”라는 관객의 자각을 이끌어내기 그리고 셋째, 후반부 ‘제사의 벽’에서 전쟁의 희생자가 숨을 거둘 때 다가오는 이승-저승의 거리감 창출의 효과를 지닌다.
거리두기를 한 채 앉아있는 10명의 배우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브레히트를 소개한다. 특히 이 때, 그의 연극에서 거리두기가 왜 중심이 되었는가를 물었을 때, 역사적-개인적 맥락에서 세계 제 1차대전의 발발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식처럼 습득할 수 있다. 브레히트에게 ‘거리두기’가 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냐면, 브레히트가 뮌헨대학 의대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1차대전의 시작은 아주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의 상흔, 폐허를 직접 바라보게 되었고, 연극을 수단으로 관객을 계몽(enlightenment)시키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거리두기’ 즉, 소외효과는 관객의 이성적(reasonable) 사고방식을 건드는데, 인물과 상황을 향한 카타르시스나 정서적 몰입이 아닌, ‘연극을 보고 있다는 강력한 자각’을 일깨워주며 그러한 이성이 극장 밖으로 나갔을 때도, 나치(Nazzi)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적 실천 행위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브레히트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관객들은 마주보고 있는 배우들과 인사를 하고, 양 옆의 관객들과도 인사를 하는 ‘거리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어보는’ 앞-옆의 관계 맺기 시도를 수행한다. 이는 ‘거리두기’를 중심으로 하는 공연에서, 거리두기 4단계 시행중인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매우 아이러니적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거리두기 상황에서 누군가는 가족들도 못 만나는 시국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지점은 필자로 하여금 ‘연극’과 ‘접촉’에 대한 사유를 상기하게 한다. 필자는 독일의 연극학자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her-Lichte)의 『수행성의 미학 (Ästhetik des Performativen)』을 통해 ‘육체성’에 대한 글을 레포트 형식으로 발행한 바 있으며, 이는 ‘접촉성’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공연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지각된다. 공연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현재성’, 이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절대적인 현재성 속에서 일어난다. 현존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관객은 연기자의 현존을 경험할 때 연기자의 체현을 경험하는 동시에 자신의 체현을 느낀다. 이는 행복의 순간으로 체험된다. 수행성의 미학은 현존의 미학이지, 기술 매체가 선사하는 현존효과의 미학이 아니다. 즉, ‘출현의 미학’일 뿐, 허상의 미학이 아니다. (…) 또한 지난 챕터 「접촉성」을 떠올려본다. 여기서는 관객-무대의 Frontness가 아닌 관객-관객의 sideness의 강조를 느낄 수 있었다. 육체성의 담론도 sideness의 개념으로 확장하여 전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기독교적 관점과 관련하여 논의를 전개한 부분도 두드러진다. 극장과 교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그 차이는 ‘내가 현존(지금 존재)하는 자리에서 옆 사람과의 관계’이다. 대게 극장에서는 옆 사람을 공연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 척한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옆 사람의 현존을 인식하고 관계 맺는다. 그들은 ‘성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모여 제의하고, 제단을 바라보는 ‘관객’이기도 하다. 공연과 긴밀히 연결됨을 다시한번 느낀다. 공연 담론은 무대와 관객에서부터 관객과 관객의 관계를 규명해주는 역할로 나아가야하는 바이다.”(조혜인)[3]
본 공연은 ‘접촉성’에 있어서도 ‘sideness’까지 고려한 지점이 두드러진다. 비록 직접적인 ‘육체적 접촉’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관객들끼리 건네는 눈짓, 음성 인사 등 어색하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정서적으로 다가가보려는 노력들은 아무리 COVID-19 시국이라도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초월적 느낌을 갖는 행위다. 성북동비둘기를 통해 동시대 대한민국에서 sideness가 더욱 확장되는 실험 공연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러한 인사들이 마무리되면, 시장에 ‘가면’이란 게임을 한다. 김민관은 이 장면이 주는 효과에 대해 “관객이 철저하게 속았다”라고 언급하며,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장된 철저한 계획이었음을 주지시킨다.
“처음 극은 관객과 배우를 마주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 그 둘의 관계는 어떤 팽팽한 긴장의 대치 상황에 가깝고 여기서 배우는 관객의 거울이 된다. 이러한 첫 장면 이후, ‘시장에 가면’이라는 시장에 갔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각기 다른 사물 하나씩을 옆 사람에게 전달하며 차곡차곡 단어를 기억에 의해 쌓아 나가는 게임에 의해 관객은 승리하게 되고, 다행히 배우는 배우의 벌칙 곧 연기를 시현하게 되며 안전한 무대는 비로소 시작될 수 있게 된다. 이는 철저한 계산에 따른 벌칙 수여로서 어떻게든 실수가 예정되었던 배우는 먼저 연기를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효과는 물론 관객이 철저하게 속았다는 것이다. 곧 관객이 게임이 잠시라도 예측 불가능성을 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김민관)[4]
그러나, 이러한 가장된 예측 불가능성을 유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존재는 언제나 ‘순수한 예측 불가능성’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다. 필자의 관극 당시, ‘동물’에 대한 단어를 쌓아 나가는 도중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 발생된 지점이 존재한다. 게임 중 “(다같이) 시장에 가면”을 외치고, 한 관객의 차례가 오자, “(관객) ‘나’도 있고” 라는 돌발적 대답이 튀어나왔다. 상식적으로 여우, 곰, 쥐 등 동물에 대한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을 뒤집는 시장에 ‘나’가 있다는 관객의 대답에 무대와 객석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박보현은 객석으로 다가가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관객에게 되물었다. 공연이 끝난 뒤 박보현과 그 관객과의 작은 대화에서, 관객은 심경을 밝혔다. 그는 게임당시 정신이 없었다. 상품이 걸린 게임이 주는 긴장감에 은근히 압도 되어있는 상태였고,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동물을 말해야 하는 당혹스러움에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본 장면에서 결과─결국 벌칙을 수행할 배우가 가면을 받게 되고, 관객의 승리로 배우가 경극을 연기하기─는 정해져 있다. 이처럼 공연의 연출은 특정 결과를 향해가지만, 그 여정에는 ‘관객’이란 존재가 함께하기에 배우들이 관객을 ‘철저하게 속이기 전’에 배우들 또한 관객으로 인해 ‘플랜 밖으로 빗겨져 나갈 가능성’이 존재한다. 애초에 목표하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공연에서는 얼마나 많은 플랜 B, C, … Z를 생성해야 할까? 관객의 수만큼? 아니면 컴퓨터공학자와 뇌과학자를 섭외해서 특정 조건에서 관객의 반응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1000가지 돌려보고 배우들이 하나씩 다 습득해서 체화 된 반응을 선보이기? 모든 열쇠는 ‘관객’ 그리고 ‘행위자와 관객의 공동 현존’의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본 공연에는 교육연극(theatre in education, TIE)적 요소와 프로파간다(propaganda)적 요소들이 뒤얽혀 사회/정치/역사를 풍자-비판한다. 비둘기로 등장한 정서현 배우의 ‘이조년’ 시 분석은 마치 서울 D동의─여기서는 ‘S동’이겠다─1타강사의 렉쳐(lecture) 형식을 띄며 관객들에게 시 속의 상징들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 시 속에 등장하는 ‘이화(梨花)’ 즉, 배꽃의 새하얀 뜻을 새겨주며, 브레히트의 ‘이화(異化)’[5]를 상상하게끔 한다. 또한 ‘아기 상어’ 음악이 깔리며, 상어들이 바다를 누비는 율동과 함께 ‘비누로 손을 잘 씻자’
는 위생 캠페인 요소를 통해 펜데믹 시대에 손 씻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한번 강조를 하며 감염 방지를 위한 노력을 교육적 요소로 쉽게 풀어나간다. 그러는 도중 율동에 맞춰 자연스레 “기호 2번!”을 외친다. 동요에 맞춰 진행되는 캠페인과 프로파간다의 한 끗과 같은 차이로 인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판에 대한 풍자가 통쾌하게 이루어진다. 펜데믹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분명 겉으로는 펜데믹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주는 공약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존재하는 이득에 대해 공약을 내거는 후보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짐작 또한 가능케 한다.
한병윤과 현채아 배우의 ‘자기소개법’은 번역/소통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창출되는 성북동비둘기만의 언어유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병윤은 ‘브레히트’(한국말을 하는 독일인)가 되었고, 현채아는 ‘현채아’(영국영어를 하는 한국인)으로 등장한다. 서로는 서로의 말을 듣고, 그들의 말에 대해서 번역을 해주는데, 이는 철저하게 ‘오역’ 되면서 결국 현채아가 하는 소개는 브레히트의 자기소개가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채아가 “Oh, This is really dangerous. (…) tight mask.”라고 말 했을 때, 브레히트는 잘못 알아들어 “마…르크스를 끼고 살았더니 좌파적 성향이…” 라는 식의 대답을 하는 것이다. 또한 현채아가 자가격리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데, “summer time! (…) hitter!” 라고 말하자, 브레히트는 “히틀러!” 라고 알아듣는다. 그들은 동시에 경례를 한다. 브레히트는 말한다. “아마도, 저는 신발보다 자주 나라를 바꾼 것 같아요.” 나치를 피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미국에 정착한 브레히트의 인생이 함축된 대사다. 본 장면에서는, 펜데믹으로 인해 직접적인 소통을 못하게 된 현채아의 답답함에 대한 호소와 넷플릭스만 보게 된 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넷플릭스(Netflix)를 너무 많이 봐서 더 이상 볼 게 없어지자, 유튜브로 거리공연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브레히트는 ‘Youtube’를 또다시 잘못 알아듣고, ‘USA’에 도착해서 동양의 가면극 노를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텐고쿠노 가이단!”(천국의 계단) 노가 시작된다. ‘아베(가) 마리야’(드라마 <천국의 계단> OST) 노래가 흘러나오며, 세 명의 악사들이 각기 맥주병, 세제 통 등을 들고나와 노 특유의 장단을 만들어낸다. 노의 행위자들은 스타벅스 등 상표가 새겨진 종이봉투 모자를 쓴 채 경직되어 총총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등장한다. 의미심장한 ‘아베(가) 마리야’가 펼쳐지며, 노의 축- 처지며 느릿하고 중성적 대사톤으로 행위자가 발화한다. “아니야----- 넌 한국의 정서----- 한정서야-------”, “일장기는---- 다시---- 돌아오는거야--------” 장면은 병렬적으로 바뀌고, 김미옥 배우가 브레히트의 아내로 등장한다. 곧이어 칠판의 한 부분이 창문처럼 열리며 베레모를 쓴 성석주 배우가 담뱃대를 든 채 브레히트로 등장한다. “서사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이 이루어지며,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히잡을 쓴 여인들이 등장해 대담을 참관한다. 브레히트는 무엇보다도 ‘이란’과 ‘아랍’의 ‘차이’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생활방식, 문화, 종교 등 많은 게 다르다는 점을 본 장면에서 지적하며 퇴장한다. ‘나 이란(런) 사람이야’ 노래가 무대를 채운다. 히잡을 쓴 이란 여인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나 이란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 그들은 격하게 춤을 추며 히잡이 스카프로 변하고, 춤동작이 점점 ‘시위’의 동작처럼 변화한다. 그 때, 초록색 스카프의 인물이 총상을 입는다. 마치 어느 시위 및 전쟁의 현장에서 무기를 맞은 듯한 동료 및 전우의 모습이 재현되며, 동료남성 동료들이 등장하고, 상처를 입은 인물은 그들에게 기댄다.
이 때, 긴 정지의 순간이 무대와 객석에 감돈다. 황급히 동료를 바닥에 눕히고, 지혈을 하기위해 네 명의 인물들이 휴지를 가지고 온다. 그러나,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제사의 벽’이 시작된다. 네 인물들은 길게 뽑힌 휴지조각을 양 손에 쥐고, 우리나라 전통 가락에 맞춰 죽어 있는 동료를 중심으로 제의적 무용을 선보인다. 이렇게 ‘제사의 벽’은 투명 비닐막과 맞물려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어느 곳의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함과 동시에 애도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우리 함께하리라. 함께 손잡으리라. 거칠은 들판에 푸르른 솔잎 되리라♫” 배우들이 서서히 하나, 둘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고, 무대 위에서 서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수고했어”와 같은 인사를 건네며 즉, 본 공연의 초반부에 관객과 관객이 서로의 sideness를 감각했듯이 배우들 또한 서로를 직렬로 감각한다. 그들은 ‘공연’이라는 특수조건 아래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다. 거리 두기를 한 채 앉아있는 관객들은 이러한 배우들의 모습을 브레히트의 ‘거리 두기’ 효과에 대한 공연이라는 소재 하에 지켜보고 있다. 배우들은 립싱크로 노래를 부른다. 어렵고 힘든 COVID-19의 상황 속에서도, 사람 대 사람으로 함께 하겠다는 의지, 함께 공연장에서 안전하게 만나겠다는 의지 등 접촉과 만남에 대한 희망을 시사하며 본 공연이 마무리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는 공연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제목이 이해 가는 공연이었다. 제목의 학술적인 느낌으로 인해 마치 삼일로창고극장의 렉쳐-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 <퍼포논문>을 연상시키는 본 공연의 제목과 다르게, 내용은 비교적 이론에 유쾌하게 접근하며 펜데믹 시대에서 ‘연극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 실험을 펼쳐 나간다. 그러면서 ‘거리두기’ 효과를 성북동비둘기 특유의 언어유희와 함께 엮어가며 다양한 형식으로 선보인다. 경극, 노와 같은 동양연극의 형식도 존재하고, 인형극적 차용을 통한 <오이디푸스 왕> 고전의 짤막한 해체로 탄생한 <코로나바이러스 왕>, 성인 및 아동 등 전 세대에게 적합한 교육연극과 프로파간다적 요소 등 당대 브레히트가 주목했던 형식을 다시 가져와 극단의 주요 관심사였던 고전의 해체 및 재구성으로 새롭게 탄생된 점이 인상깊다. 제목 그대로 브레히트의 ‘거리두기’효과를 창출했던 연출적 요소들을 반영해 병렬적으로 배우의 연기에 반영하는 실험을 해보았고, 그것이 동시대 대한민국의 COVID-19상황과 만나 브레히트와 대한민국 사이에 새로운 교집합이 형성되는 부분이 생성되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브레히트와 현 상황의 ‘거리두기’를 통해 ‘접촉’을 다시 사유하게 하며, ‘미국으로 망명한 브레히트 또한 고국 ‘독일’에 대한 그리움과 접촉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라는 조국을 잃은 그의 마음이 가까이 느껴지는 공연이었던 점이다. 비록 동시대의 대한민국 관객은 독일과 8000km 떨어져 있고, 브레히트와 한 세기를 건너 뛴 머나먼- 기나긴- ‘거리두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 극단 성북동비둘기, <성북동비둘기와 함께 실험연극의 창공을 가를 단원을 모집합니다.>, 페이스북, 2021-07-21, https://www.facebook.com/SEONGBUKDONGBEEDOOLKEE
[2]이는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 <보더라인>(2020)의 리뷰 내용 “<보더라인>은 한국의 공동창작 실험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와 독일의 레지덴츠테아터가 협력하여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공연이었지만 코로나의 위험성 앞에 서울-뮌헨 8,000km를 아우르는 기술 도전이 되어버렸다.”를 참조했다. 조혜인, <'경계'에 대하여: 2020 SPAF <보더라인>,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 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갈라>> - <1. NN들을 위하여 –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 드라마인 Dramaㅅ, 2020-12-15, http://www.drama-in.kr/2020/12/SPAF2020.html
[3] 2019년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기예술학과 ‘현대공연예술미학’(교수자: 남지수) 수업을 통해 작성한 레포트를 발전시켜 필자의 브런치(brunch)에 발행했다. 원문으로 접속하면 김정숙 옮김 『수행성의 미학』,2017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공연 이미지들도 감상할 수 있다. 조혜인, <육체성(die körperlichkeit): 『수행성의 미학』을 중심으로』, 브런치 매거진 <연극 탐구생활 PLTAM 플탐>, 2021-07-19, https://brunch.co.kr/@hichotheatre/41
[4] 김민관, <효과는 의미를 초과하는가> , ARTSCENE, 2021-07-22 https://www.artscene.co.kr/1749?fbclid=IwAR1yFyOo6mj-hYd3JeEOCGd4ZC10VLJMj4Sln01Mo9MYlVmDmJ13sBvP9zY
[5] 성질, 양식, 사상 따위가 서로 달라짐. 브레히트의 생소화 효과는 ‘이화효과’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