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성균관대 하계연극제] <도리야기>를 중심으로
기고자: 조혜인
기고 마감일: 2019-09-02
올해의 뜨거운 여름이 지났다. 장장 한 달간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는 하계연극제를 개최하며 네 개의 작품이 데굴데굴 굴러 마지막 종착지를 향했다. 공연의 구름이 멈춘 그곳에는 <도리야기>가 새롭게 구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연주 작/연출의 <도리야기>는 웹드라마 <하지 말라면 더 하고 19>의 신기환 배우와 2019 삼일로창고극장 <24시간 연극제>에 출연한 김용오 배우와 함께한다. 신 배우는 도리(돌)가 되었고, 김 배우는 도리를 둘러싼 환경을 조성하는 조력자 역할이자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 역할도 하면서, 때로는 서사의 생성을 위해서 과감히 개입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두 배우의 케미와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앞 길의 환경이 어우러졌을 때, 관객에게 어떤 감각을 선사하는가?
돌. 돌은 흔한 것이다. 하지만 돌은 흔치 않게 우리 일상 속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도리야기>는 그런 돌에 대한 이야기다. 본 공연에서는 돌에게 생명성을 부여함으로써 돌에게 팔과 다리가 있으며 걷고, 달리고, 뛴다(Jump). 바로 이 점이 도리의 특별한 점이다. 자신의 ‘돌 됨’을 긍정하는 도리는 고정성이 아닌 ‘이동성’을 가지며 관객의 걷기(Gehen)과 만난다. 본 공연은 산책 연극이다. 이러한 형식은 다큐멘터리 연극의 한 요소로서 크리에이티브 VaQi의 <워킹홀리데이>에서 시도된 바 있다. <워킹홀리데이>와 관련하여 연극인 웹진에서 김태희 평론가는 걷기의 역설에 대해 시사한다.
“걷기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가장 역설적이다. 그것은 가장 부단한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1]
분단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경계를 보행하며 서사를 썼던 <워킹홀리데이>의 창작 과정에서는 부단함 속에서도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며 일상에서 미처 포착해내지 못했던 것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전쟁에 대한 감각, 분단이 상업화된 지점,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살아온 삶이 한순간에 배반될 수 있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처럼 걷기는 내가 걷는 그 환경과 내가 관계 맺으며 주변을 느끼도록 한다. 나아가 어떠한 인식을 갖게끔 한다. 내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타자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끔 한다. <워킹홀리데이>의 걷기 과정에서 만났던 타자들처럼, <도리야기>에서는 도리라는 타자가 우리 앞에 반짝이는 광석처럼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나(도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당당히 <도리야기>라는 제목을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리의 이야기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전에, 우리는 도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었는가? 만약 도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왜 없었던 것일까? 본 공연에서는 도리(혹은 돌)라는 타자화된 대상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부싯돌과 같이 관객의 일상을 균열 내며 잊고 있었던 타자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본 공연은 퇴계인문관 앞 길을 중심으로 교내 곳곳을 이동한다. 세심하게 관심을 갖지 않는 한, 혹은 꼭 필요한 용무가 있어서 방문하지 않는 한, 어쩌면 재학 중 단 한 번도 가볼 일이 없는 학교의 뒷골목 같은 장소에서 퍼포밍이 진행된다. 공연은 마치 산책(Der Spaziergang)처럼 뚜렷한 기승전결보다는 유유자적한 이동과 실천적 신체가 두드러진다. 플롯의 클라이맥스나 엔딩보다는 장면마다 순간적인 인상이 돋보인다. 그러면서 관객은 퍼포머를 둘러싼 관객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풀, 꽃, 계단, 바닥 사이의 갈라진 틈, 존재하는 근본적인 머터리얼(Materials), 가로등 빛, 바람, 20시경의 어둑한 하늘들이 감각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일상에서 당연하면서도 스쳐 지나가던 타자들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지 않는 감각을 마주한다. 아니,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그저 당연하게 여기고 살고 있었던 것이라는 감각을 마주한 것이다. 게다가 돌은 영웅적인 고귀한 신분을 가졌으며 보통 이상의 지력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품게 된 씨앗에게 “내가 돌이라서 미안해”라며 눈물 흘리는 연약한 마음을 가졌다. 이 대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컫는 ‘영웅’이 아닌 ‘일상의 영웅’으로서 돌 캐릭터가 보이는 지점이다. 내가 온몸과 마음을 다해 품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지켜주고자 하는 희생정신, 때로는 우직하고, 때로는 거세게 부딪히고, 때로는 눈물 흘리는 이러한 모습은 행동(Action)으로서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겉모습은 단단하고, 거칠고, 울퉁불퉁하지만 속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여리며 자애로운 성질을 가졌다. 강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돌의 역설이 드러남으로써 나의 겉모습과 내면을 성찰하게끔 한다. ‘나는 겉과 속이 같은 존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돌인가…’
인문학에서는 걷기 혹은 산책은 중요한 주제로서 오래전부터 다루어졌다. 많은 작가들, 창작자들은 비결정적 경로 위를 산책함으로써 새로운 관찰을 수행하고, 창작의 원동력을 얻곤 했다. 때로는 작업이 머릿속에서 계획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부단히 움직이는 몸의 과정처럼 그 과정 가운데 인식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걷기라는 주제로 언급될 수 있는 작가로는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가 있는데, 그는 “걷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분 좋으며, 태곳적 단순함을 간직하고 있다”(Der Spaziergang, 28) 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산책에서 목격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함으로써 그것을 기억하고, 나아가 그것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는 무심결에 저절로 끄적이는 순간적인 인상에 근거를 둔다.[2] <도리야기>도 이동 가운데 스쳐 지나가며 감각된 세계가 기억이라는 사진으로서 찍힌다. 퇴계인문관 앞 길이라는 공간을 이동하며 그 속에서 이야기를 쓰고, 서사를 만드는 행위가 퍼포머와 관객 모두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다만, 본 공연에서 아쉬웠던 점은 결국 공연은 앉아서 봐야 한다는 연극적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되는 점이다. 관객 배려의 차원에서 방석을 나눠주었지만 총 일곱 번의 이동 가운데, 각각의 이동이 진행된 직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스팔트 바닥에 방석을 깔고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착석을 해버리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발견되었다. 필자 또한 그 관객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즉, 야외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이 존재했다는 점이 아쉬운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공연에서는 도리가 처음으로 걷고, 뛰고, 구르던 그 장소로 회귀하는 보행 과정에서 새로운 호모-이매지넌스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며 걷는 도리 뒤에는 자신의 몸을 세상을 위해 내어 준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는 돌의 파편들이 형광 발현하며 아스팔트 바닥 위에 깔려있다. 본 장면은 윤동주의 「반딧불」을 떠올리게 한다.
가자 가자 가자 / 숲으로 가자 / 달조각을 주으러 / 숲으로 가자. //
그믐달 반딧불은 / 부서진 달조각 //
가자 가자 가자 / 숲으로 가자 / 달조각을 주으러 / 숲으로 가자.
「반딧불」 -윤동주-
위 시에서는 반딧불을 달조각에 비유한다. 검은 밤에 어린아이가 숲을 산책하며 반딧불을 수집하길 기대하는 그 설렘에 대한 보행의 서사가 함축되어있다. 시를 통해 꽉 찬 둥근 보름달이 제 몸을 쪼개어 파편 되어 이 땅에 반딧불이로서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필자는 그런 달 조각을 주으러 맑은 영혼의 아이가 걷는 산책길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가자, 가자, 가자! 퇴계인문관 앞 길로 가자.” 우리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도리가 떼어준 제 몸들로 인해 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이 되는 아름다운 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돌은 더 이상 우리의 발 밑에 거슬려서 차 버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산책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생명의 숭고한 희생정신 또한 우리가 <도리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이다. “왜 나는 별이 아닌 걸까?”라고 자기 자신에게 되묻던 도리가 떠오른다. 그렇다. 도리는 돌이다. 하지만 돌이라서 소중하고, 돌이라서 돌의 몫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놀라운 사실을 통해 도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별도 돌이라고. 별도 도리라고.
[1] 김태희, 어느 산책자들의 발걸음을 뒤따르며: 크리에이티브 VaQi <워킹홀리데이>, 서울연극센터 연극인, 2017-11-23, http://webzine.e-stc.or.kr/01_guide/actreview_view.asp?SearchKey=L&SearchValue=%EC%82%B0%EC%B1%85&rd=&flag=READ&ldx=1092
[2] 안미현, 「걷기의 수사학」, 『독일언어문학』 제82집 ,2018 ,25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