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몽키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를 중심으로
공연일시: 2020-01-04 15:00
공연장: 연우소극장
본 리뷰는 2019 청년예술지원사업 서울청년예술단 리뷰/비평에 참여된 글임을 밝힙니다.
스페이스몽키의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공동창작, 정성경 연출, 전강희 드라마트루그)[1]는 초연과 재연을 거듭하여 그 세 번째 무대를 연우무대에서 선보였다. 네 명의 배우들이 수평으로 나란히 줄지어(혹은 평행하여) 등장해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를 거듭 강조하며 공연은 시작된다.
이어 “피해 받은 개인은 참 안쓰럽지.”, “입사한지 3~4개월 됬는데 생리가 안 나오는 거에요.”, “아이가 죽으면 그 순간 다 멈춰버려요.”와 같은 증언 형태의 대사들이 줄 지은다. 장면이 바뀌면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자기이야기를 한다. 돈을 많이 못 벌어다줘서 미안한 배우 ‘수연’, 2014년 4월 16일, 어린 조카와 함께 맞이한 ‘선우’의 일상적 아침, 학창시절 만화방과 숙모가 끓인 라면에 대한 기억을 가진 ‘호현’, 더운 나라에서 사는 중 교미를 마친 수개미 무리떼가 집 천장을 가득 메웠지만 선뜻 죽이지 못했던 ‘윤경’의 사적 기억은 자기이야기로서 발화된다. 또한 이러한 기억들은 다른 배우의 몸을 통해서 재수행된다. 이 때, 기억의 당사자는 수행자를 연출한다. 당사자는 수행자에게 느닷없이 트위스트를 추라는 이질적인 주문을 가하기도하고, 수행자 스스로가 입을 막게 연출하여 호흡을 곤란하게 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수행하는 타자에게 자기 자신이 되게 하고자 디렉팅하는 본 장면을 통해 ‘진정한 내가(당사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당사자에 가 닿으려 해도 결국 그들의 세세한 의도와 내면까지 파악하지 못한다. 그게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되려는 시도가 지속 될 때, 아이러니와 고통을 직면해야 함을 시사한다.
본 공연은 이와 같이 ‘나’와 ‘타인’(이하: 너)이 만나고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정성경 연출에 의해 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해본 바, ‘버바팀 연극(Verbatim theater)'의 형식으로서 관객과 마주한다. 버바팀 연극은 다큐멘터리 연극(Documentary theater)의 한 갈래로서 ’증언의 연극(Theater of Testimony)'으로도 일컬어진다. 인용과 편집의 연극이기도 한 버바팀 연극은 발화된 기록, 녹취 그리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무대 위에서 재발화되는 연극이다. 즉, 버바팀 연극은 사건과 관련하여 실제 발화된 말을 모아 편집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관객이 진실에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연극이다.
본 공연에서 이러한 버바팀 형식을 채택함으로서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바로 연우무대라는 블랙박스[2] 안에서 연극과 관객이 랑데부(Rendez-vous)[3] 하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진 연극의 구성원들이 타고있는 ‘삶’이라는 우주선이 같은 궤도를 통해 ‘세계’라는 우주에서 만나 서로 나란히 비행하는 것이다.[4] 여기서 이들의 우주선이 부유하는 궤도에는 ‘공감’이라는 기저가 깔려있다. 마치 우주선의 비행을 위해 엔진에 오일이 필요하듯, 궤도 위에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도록 공감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본 공연을 위한 랑데부의 필수요소는 바로 공감이다. 연출적 전략으로 버바팀 형식을 채택한 의도는 바로 블랙박스 내 랑데부 공동체의 공감을 지향하기 위함이다.
또한 본 공연의 버바팀은 ‘비망각(非忘却)’을 지향한다. 삼성 반도체 사건의 피해자 故 황유미의 실제 주변인을 인터뷰함으로서 채집된 언어들과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무대 위에서 전시 및 발화 될 때, 관객은 분주한 일상 속 잊고 있던 사회적 참사들과 그것에 대해 느끼는 개인적 경험에 대한 연결고리를 다시 상기하게 된다. 아래는 망각이 지닌 비극에 대한 위험성을 작업을 통해 사유한 사진작가 신웅재의 작업노트 중 일부이다.
“‘종결’되었다고 믿는 순간 망각은 시작된다. (중략)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이야기되는 순간, 사람들은 모든 것들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망각은 문제에 대한 사유와 공감, 이에서 비롯되는 행동의 변화를 소멸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똑같은 문제와 비극을 반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문제로 일으킨 가해자는 망각을 촉진하며, 이는 가해자가 지닌 힘에 제곱 비례한다.”(신웅재)
그는 반도체 피해노동자들의 11년 투쟁의 기록을 작업했다. 그의 작업과정은 사건에 대해 많은 것들을 사유하게끔 하지만,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가 주는 강력한 오브제성에 의해 공연 중 등장하는 반도체노동자의 작업복을 떠올리게 한다. 제조과정에서 처리된 독성화학물질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는 작업복이 아닌 반도체를 사람으로부터 지키려는 작업복은 부패된 기업윤리와 사회를 함축한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반도체 작업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연민과 공포 즉, 페이소스(Pathos)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신웅재의 사진작업과 스페이스몽키의 버바팀 작업은 망각으로 무지해진 우리의 사유에 공감을 불러일으켜 균열을 낸다. 이 두 작업은 사회적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비록 시간이 오래 지냈고, 투쟁 끝에 사과를 받았기 때문에 잊혀져야 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오히려 다시금 드러냄으로써 비망각, 즉 잊지 않음을 통해 공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공감을 통한 행동 변화의 촉구를 일으키므로 이 두 작업은 ‘세미-브레히트(Semi-Brecht)’[5]적이다.
결국, 이러한 공감의 버바팀(Verbatim of Sympathy)이 선사하는 랑데부는 ‘나=너’ 즉, 나와 너의 평행이다. 증언으로 가득 차 현실을 있는 그대로 구성함으로써 그 현실에 관객이 뛰어들게 하는 것, 그 현실에 관객이 철저하게 몰입하게 하는 것, 그 현실에 관객이 당사자에 가 닿아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현실과 관객이 랑데부하게 될 때, 나와 너 그리고 너와 내가 랑데부 하게 될 때, 우리는 또 다른 증언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인 즉슨, 또 다른 버바팀의 당사자로서 발화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망각에 반(against)하여 또 다른 랑데부에 참여 할 우주선을 소환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궤도 위에서 ‘나=너’의 평행을 끊임없이 실험해왔다. 평행, 즉 나란히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을 무대를 통해 고민한 것이다. 마침내 공감의 버바팀 형식을 시도함으로써 관객의 일상에 공감을 통한 비망각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킨다.
[1] 2019 연우무대 프로파간다(Propaganda) 시리즈
[2] 통상적으로는 벽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진 ‘극장’이란 뜻으로 사용되지만, 본 리뷰에서는 우주 혹은 세계로 해석 될 수 있다.
[3] 우주의 같은 궤도 상에서 두 개의 우주선이 만나 나란히 비행함
[4] 여기서는 비단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 및 스텝 뿐만 아니라, 연극이 가진 궁극적인 힘인 ‘Here and Now’의 측면에서,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창작 과정 가운데 언제나 위치하는 ‘관객’을 포함하는 바 임을 주지한다.
[5]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소격효과(Verfremdungseffeckt)’의 창시자이다. 요컨대, 이는 ‘낯설게 하기’다. 이것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극에 몰입하게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Catharsis)’와는 대척점에 있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감각하게 하여 관객을 계몽시킴으로서 그들이 극장 밖을 나섰을 때 어떤 행동을 하도록 프로파간다 하였다. 본 공연이 ‘세미-브레히트’적이란 주장은 본 공연이 이성을 통한 개인적/사회적 계몽이기보다는, 공감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잊고 있던 사회적 아픔을 재상기 시키고 망각에 대한 공포를 자각시킴에 있어 극장 밖을 나갔을 때 어떠한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세미-브레히트적이란 말에는 프로파간다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