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장의 타임라인>11월 26일
또다시 토요일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습니다. 입에 담지도 못할 뉴스들이 하루가 멀게 보도되고 시민들은 오늘도 광화문으로 출근하려 부산한 주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미애 대표의 '청와대 식수 중단' 그리고 김무성 전대표를 향한 '권력의 부역자' 발언에 이정현 대표는 '정치보복' '색깔론' 등의 단어로 대응하였습니다. 과거 야당이 쓰던 단어를 여당 대표가 사용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가르쳐준 첨단 의학 용어
<프로포폴>이라는 어색한 단어가 입에 익숙해지는 순간, <에토미데이트:전신마취제> <풀루닐주사:해독제> <비아그라 :발기 부전 치료제> <팔팔정 : 발기 부전 치료제> <서카딘서방정 : 불면증 치료제> <라이넥주-멜스몬주 : 태반주사> <루치온주 : 백옥주사> <푸르설타민주 : 마늘주사> <히시파겐씨주 : 감초주사> 등의 의약품 목록이 공개되면서 또다시 새로운 의약품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 <베테랑>에서 보았던 재벌들의 파티 장면이 연상하는 것이 전혀 무리가 없겠지요. 워싱턴포스트는 ‘Blue pills in Blue House(푸른 집 안의 푸른 알약)’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했고 북한의 김정은이 잊히지 않는 존재감으로 맥을 잇고 있는 '동방의 등불 코리아'는 박근혜 국정농단으로 화려하게 바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는 304명의 고귀한 어린 생명과 함께 침몰했고, <청와대>는 304알의 비아그라와 함께 서서히 침몰하고 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도 발견하기 힘든 이유' 그녀의 <무능과 배임> 때문이고,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말도 되지 않는 뉴스에도 사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똥고집> 때문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대중
최근에 수직적 도시형 생활에 염증을 느낀 저는 아파트를 매각했습니다. 그리고 집 근처에 <단지형 전원주택지>를 구입하고 관련하여 잠시 <입주자 대표>를 역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건설회사는 현 정부 빰치는 무능력으로 토지조성은 지속적으로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않을뿐더러 지연에 따른 설명과 양해를 구하지 않는 회사의 태도에 저는 분개했습니다. 저는 입주자들에게 건설사의 부당함에 대해 동의를 구하고자 했고 강력하게 항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매일같이 단톡방에 의견을 구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독려했지만 결과는 싸늘했고 모두가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저렴한 주방가구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 경우는 정말 놀랍게도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좌절 그 자체였습니다. 이후에도 이 일을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이 것이 집을 짓는 사람들만의 문제일까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저도 여러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이러한 무관심을 즐기며 주변을 서성이는 <부역자>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미시적 가치관
무엇이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고 있는지는 확연합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이득> 그것이 대중의 행동을 가르고 있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경제학> 논리에 따라서 자신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무엇이 나쁠까요? 문제는 그 시각이 극히 <미시적>이라는 부분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이 사태를 되돌아봅시다. <정유라>가 부정입학을 저지르고 출석도 하지 않고 학점을 챙기는 부정함은 <이화여대> 학생들의 궐기를 촉발했고 온 국민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지요. 우리 아이는 그 어렵다는 대학에 가겠다고 밤늦게까지 청춘을 불태우고 있고 부모는 먹을 것 입을 것 참아가면서 학비를 벌고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학사 농단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정유라>를 캐었더니 <최순실> <최태민> <차은택> <우병우> <대기업> <린다킴> <로기드마틴> <차음병원> <박근혜> 줄줄이 딸려 나오는 이 끊어지지 않는 부패의 사슬에 나라는 발칵 뒤집혀 버렸습니다. 왜 우리는 미리 분개를 하지 못했는지 반성을 해야 합니다. 2014년 4월 목이 터져라 보도를 한 <JTBC> 뉴스와 수많은 재야 인터넷 언론의 주장에 시민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은 청와대의 치밀한 여론 공작에 시민들은 그냥 손을 들었던 것이지요. 누구의 탓일까요? 지금은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청와대를 비판하는 권력의 부역자 <조선일보>와 종편 방송들을 탓할까요? <국민연금>의 근거도 없는 합병 찬성에 우리는 관심이 없었고, <K스포츠> <미르>에 800억을 주던 말던 그것은 당장 우리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아니었던 것이었지요. 재벌의 부역자 <KBS> <MBC> <여의도 증권사>를 탓해야 할까요?
사슴사냥 게임
경제학에 <사슴사냥 게임> 이론이 있습니다.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이야기에서 비롯했고 장 자크 루소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냥꾼 여럿이 사슴사냥에 나섰다. 사냥에 나선 사냥꾼 모두 사슴 한 마리만 잡으면 넉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동감한 그들은 협력하기로 하고 사슴 한 마리를 몰아 산 위로 포위망을 점점 좁혀갔다. 그런데 그때 사냥꾼 한 사람 앞으로 토끼가 지나갔다. 이를 본 사냥꾼은 [사슴을 잡지 못해도 토끼 한 마리면 자기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 사냥꾼은 토끼를 쫓아 포위망을 이탈하고, 그 틈을 이용해 사슴은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사슴사냥 게임은 한 사냥꾼이 토끼를 발견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잇속만 챙기려다 많은 사람들의 배까지 채워줄 수 있는, 즉 더 가치 있는 ‘사슴’을 놓친 부분을 꼬집는 개념입니다.
협력과 상생
눈앞의 이익. 전원주택을 지을 때 <건설사>의 무능과 지연은 화나기는 하지만 이웃처럼 집을 팔고 월세를 내고 있지는 않아서 좀 늦어져도 나는 괜찮다는 생각,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의 아이가 아님이 천만다행이라는 안심, <국민연금>의 부조리는 당장 내 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들은 눈앞의 ‘토끼’에 현혹되어 ‘사슴’을 놓치는 행동이며 <협력과 상생>이라는 경제학의 <거시>를 갖고 있지 않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가 아닐까요?
이어폰을 휘감고 깨는 아침
어제 <JTBC> 뉴스룸 시간을 놓쳐서 잠자리에 들면서 모바일로 이어폰을 꽂고 듣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어폰 줄이 목에 엉켜있더군요. 2007년 회사에서 외국 학술 연수 프로그램을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갑자기 제도가 바뀌어 어학등급 자격을 샹향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규정에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어학 공부를 했고 그때도 <아이리버 MP3>이 이어폰 줄이 어김없이 아침에는 목에 휘감기워져 있었습니다. 당시에 힘들게 학습하던 중 발견한 <족보 없는 이 시대의 저널리스트> 손석희 앵커의 글을 읽고 감명받아서 블로그에 간직하고 있었던 <손석희의 지각인생> 이란 글을 옮겨 봅니다. 후퇴를 해도 한참을 후퇴한 대한민국의 역사. 늦었다고 생각할 때 이미 앞서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고, 나이가 지천명을 훌쩍 넘긴 무지한 저 같은 공돌이에게도 다름이 아닐 것으로 자신하고 있습니다.
손석희 앵커의 지각인생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 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 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 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 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