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클래미
개인적으로 "디스토피아" 장르 영화를 좋아합니다.
디스토피아라고 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부터 사이버펑크까지 하위 장르가 너무 많아서 각자마다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는데요. 저는 스토리나 비주얼보다 그 특유의 '찜찜함'이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뭔가 우리의 존재와 현실이 우주의 먼지보다 하찮다는 느낌을 주는데, 슬프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참 애매한 감정을 들게 해요. 그래서 사실 자주 보기에는 조금 힘듭니다.
우선 제가 디스토피아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늘 본질과 진실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 약(매트릭스)과 빨간약(바깥세상)을 건넸을 때, 아마 저도 빨간약을 선택했을 것 같아요. 물론 영화를 보면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너무 처참하고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물들도 몇몇 있었지만요. 결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실을 아는 것이 저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보통 디스토피아 영화에서는 죽음 이후의 삶, 인간의 정의 등 꽤 심오한 주제를 다루는데요. 저는 이런 주제를 탐구하고 성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신앙에 관련된 대화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이런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살아갈 동기부여를 잃게 되더라고요. 이러한 신념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가치관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많이 다루는 디스토피아 장르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홀로 남아 있거나 산소통을 맨 채 우주에서 표류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려는 모습을 보면 저는 인류애를 느낍니다. 작게 보면 한 사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버둥 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인류라는 우리의 존재를 이 거대한 우주에 조금이나마 더 오래 흔적을 남기려는 사명감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영화가 아닌 현실로 돌아오자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힘들지만, 영화에서 보던 디스토피아 세상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IT 엔지니어들이 예견하기로 5년 안에 Normal Life는 끝나고 터미네이터에서 본 스카이넷 혹은 유토피아, 둘 중 하나의 세상이 찾아올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인간이 지금도 AI의 발전을 컨트롤할 스위치를 갖고 있지만, 경쟁의식 때문에 어느 누구도 멈출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이 있어서 5년 후에 세상이 더 좋아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쟁과 전쟁, 전염병 등을 겪었지만, 그래도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고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일론 머스크를 보고 무언의 희망을 느낍니다. 물론 도지코인을 외치고, 트위터에서 날뛰는 우려스러운 모습도 존재하지만요. SpaceX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들으면 한 편의 디스토피아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언젠가 어떤 이유로든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현실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현재 인류에게 해답이 있을까요? 아마 일론 머스크를 포함해 소수의 글로벌 리더들만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현실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감사함을 느낍니다.
막상 지구의 문제가 생겨서 화성으로 이주해야 할 때,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내가 같이 못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모두가 죽는 것보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서 기회를 모색해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가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희망을 보는 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알게 된 <러브, 데스 + 로봇>이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장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5~20분짜리로 구성된 시리즈인데요. 짧게 하나씩 보기에 좋지만 워낙 심오하고 찜찜해서 계속 보기에는 힘듭니다. 저는 그중에서 "강렬한 기계의 진동(The Very Pulse of the Machine)"이라는 편을 추천합니다.
내용은 목성의 위성 이오에서 탐사를 하다가 화산 폭발로 인해 불시착합니다. 부족한 산소통을 이끌고 걸어서 41km 떨어진 기지로 복귀를 시도하는데요. 체력의 부침을 이겨내기 위해 모르핀을 계속 주사하는데, 부작용으로 환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환각에서 깨어나자 산소는 2분밖에 남지 않은 채 드넓은 마그마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허공에서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본인이 위성 이오 그 자체라며 주인공에게 마그마에 뛰어들면 육체는 파괴되겠지만 정신은 남아 있을 것이며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주인공은 목소리에게 '네가 기계라면, 네 기능은 무엇이지?'라고 물으니, 목소리는 '너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주인공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결국 마그마에 몸을 던집니다.
마지막에 지구와 교신이 다시 연결되면서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위성 이오의 말대로 서로 합쳐진 존재로 주인공이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이 '강렬한 기계의 진동'이고 Pulse를 진동으로 해석한 걸로 보니, 처음에는 주인공이 위성 이오를 무생물(기계)로 인식했지만, 이후 서로 대화하고 교감하면서 위성 이오에게는 없었던 생명력을 입히고 주인공은 육체를 초월하는 정신적 영생을 얻었던 게 아닌가 해석됩니다.
특히 '너를 아는 것'이라는 대사는 소름을 돋게 만들었는데요. '안다'는 것에는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무생물, 기계, 위성)와 서로 알아가고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매우 감동적이고 위로가 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