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외국인이 AI 창업하기

Written by 클래미 & 클로드

by 클래미

*실리콘밸리 PM에서 뉴욕 AI 창업가가 된 고등학교 후배와의 대화*


고등학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실리콘밸리의 금융 소프트웨어 상장사에서 Product Marketer로 5년간 일하다가 뉴욕으로 건너가 AI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친구다. 외국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창업을 하고, 투자를 받고, 서비스를 런칭해서, 네트워킹하면서 영업도 하고, 고객을 만들고 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진출을 한다면 예상되는 허들이 많다. 근데 오히려 비자 같은 법적인 것은 그냥 부딪히면서 해결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영업할 때면 쫄리는데 해외 현지인에게 꿀리지 않으면서 물건을 판다니. 근데 글로벌 마인드셋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결국 그 나라 사람도 나 같은 인간이다라는 점을 자각하는 거 같다. 그냥 그 눈앞의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것은 똑같다.


어쨌든 이 친구가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운영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국 두 가지로 정리됐다.


첫째, 본인이 있었던 도메인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AI 시대에 레버리지한다. 특히 그 분야가 레거시 분야라면 기회는 더 크며, 실제 미국인들의 로컬적인 페인포인트와 맞닿으면 더 파워풀해진다. 예를 들어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더 신용으로 물건을 사는 경우가 많아서 신용 점수가 낮은 사람들이 훨씬 많고, 그래서 신용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대출 서비스 스타트업들도 있는데 금방 유니콘이 된 기업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현지인만 아는 사업들이 발전이 된다.


둘째, 해외가 현지가 된다. 당연히 해외는 여행도 긴장된다. 근데 그곳이 해외가 아니고 현지가 된다면? 비자나 이민이라는 허들을 넘으면 금방 인간은 적응을 하면서 살아간다. 오히려 비자나 영업보다 더 힘든 것은 현지에서 은행 계좌 만들고, 아파트 계약하고, 핸드폰 개통하고 등 정말 라이프스타일적으로 그 나라의 시스템에 녹아드는 것일 수도 있다. 사업과는 별개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걸 통해서 그 나라에 녹아드는 거다.


오늘은 그 친구와 캐주얼하게 논의하면서, 미국에서 통하는 어떤 스타트업 아이디어를 냈길래 잘 다니던 상장사 회사를 퇴사하고, 그리고 이전 회사와 다시 경쟁하는 입장에서 시작하는지 얘기를 들어본다. 진짜 미국에서 살아만 봐야지 알 수 있는 사업이라서 꽤 신기하다.


아, 마지막으로 Claude Bloom 2차 행사를 진행하게 될 것 같다. 이번에는 라운드 테이블 형식의 소모임 및 네트워킹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이니, 댓글을 남겨주시면 관련 소식을 바로 안내해 드리겠다!




1. 5년이 준 것

후배는 미국 중소기업들이 가장 많이 쓰는 재무관리 플랫폼에서 5년간 일했다. 그 플랫폼의 주요 고객은 서비스 기반 소규모 사업자들이었다. 청소 서비스, 조경 서비스, HVAC(냉난방) 서비스. 이런 업종의 사업자들과 5년 동안 직접 부딪히면서 그들의 워크플로우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고 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이 기간 동안 쌓은 게 "기술"이 아니라 "도메인 지식"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업종의 사업자가 어떤 순서로 일하고, 어디서 병목이 생기고, 무엇을 수동으로 처리하는지. 코드를 한 줄도 짜지 않았지만, 그 5년이 창업의 기반이 됐다.


2. 모든 업체가 같은 수동 작업을 반복한다

후배가 발견한 패턴이 있었다. 서비스 업종의 소규모 사업자들은 전부 같은 워크플로우를 따른다는 것이다. 새 고객으로부터 문의가 들어오면, 응답하고, 협상하고, 견적서를 만들고, 계약서에 서명을 받고, 인보이스를 보내고, 대금을 수금한다. 업종이 청소든 조경이든 HVAC든 이 흐름은 동일했다.


그리고 새 고객들이 물어보는 질문도 거의 비슷했다. 사업자들은 그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전부 수동으로. 일부 사업자들은 필리핀에 가상 비서(Virtual Assistant)를 고용해서 이 작업을 정리했다. 해외 인력을 쓰다 보니 시차가 있고, WhatsApp으로 소통해야 하고, 실수도 잦았다. 그런데도 이 방식이 "그나마 효율적인 방법"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후배는 여기서 기회를 봤다. 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워크플로우를 AI 에이전트가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시차도 없고, WhatsApp도 필요 없고, AI가 그냥 사업자와 함께 일하는 구조. 오프쇼어 VA를 고용하는 대신 AI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3. End-to-End에서 한 가지로 좁히기

처음 구상은 이 워크플로우 전체를 AI로 자동화하는 것이었다. 문의 응답부터 대금 수금까지. 그런데 막상 소규모 사업자를 대상으로 시작해 보니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고 했다. "당신이 내 가상 비서를 대체한다면, 그 비서가 하던 일 전부를 해 줘야 한다." 그게 고객의 기대였다. 전체 워크플로우를 다 커버하려면 유스케이스가 너무 많고, 제품의 범위가 감당할 수 없이 넓어졌다.


그러던 중에 사모펀드(PE)를 통해 한 고객을 만나게 됐다. 미국과 캐나다에 200개 프랜차이즈를 가진 청소 서비스 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인보이스를 발송한 뒤 고객들이 늦게 결제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필리핀에 4명짜리 팀을 따로 고용해서 수동으로 이메일을 보내며 미수금을 추심하고 있었다.


후배는 여기서 방향을 틀었다. 전체 워크플로우를 다 하는 대신, 맨 끝단의 한 가지 일만 확실하게 하자. AR collection, 즉 미수금 추심. AI 에이전트가 이 한 가지 일을 잘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전부 다 하겠다"에서 "하나를 잘하겠다"로의 전환이었다.


4. 필리핀 4명이 하던 일

첫 유료 고객이 된 그 200개 프랜차이즈 청소 기업의 상황이 구체적이었다. 인보이스를 보내면 고객들이 제때 결제를 안 한다. 그래서 필리핀에 있는 4명짜리 팀이 수동으로 이메일을 하나하나 보내며 미수금을 쫓고 있었다. 시차가 있어서 실시간 대응이 안 되고, 이메일에 오류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일의 본질은 단순했다. 정해진 타이밍에 정해진 메시지를 보내고, 응답에 따라 후속 조치를 하는 것. AI 에이전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이 고객을 사모펀드가 소개해 줬다. 사모펀드는 청소 서비스 프랜차이즈에 투자하는 곳이었고, 자기들이 투자한 회사의 운영 효율을 높이고 싶어 했다. 후배의 솔루션이 딱 맞았다.


5. 소규모에서 중견으로

타겟도 바뀌었다. 원래는 소규모 사업자를 대상으로 했지만, 실제 유료 고객이 된 건 매출 3천만 달러 이상의 중견 기업이었다. 이 규모의 회사들은 이전 직장의 플랫폼을 쓰기엔 너무 크고, 그렇다고 최신 SaaS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후배가 만난 고객은 1998년 버전의 Microsoft 제품으로 사업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만큼 레거시한 환경이었다.


이 지점이 흥미로웠다. 레거시 산업, 레거시 소프트웨어, 레거시 프로세스. 전부 수동이고 전부 오래됐다. 그런데 바로 그 "오래됨"이 AI 에이전트에게는 기회가 된다. 최신 테크 회사들은 이미 내부적으로 자동화를 하고 있거나 직접 만들 수 있다. 하지만 1998년 소프트웨어를 쓰는 회사들은 바이브 코딩은커녕 AI를 자체 도입할 역량 자체가 없다. 그 간극이 시장이다.


6. 엔젤 투자, 제품 없이

투자 이야기도 나왔다. 제품이 아직 없는 상태에서 엔젤 투자를 받았다고 했다. 300K 달러에 지분 9%. 기업가치 330만 달러. 실리콘밸리 기준으로는 표준적인 엔젤 밸류에이션이라고 했다. 팀은 단 두 명이다. 본인이 CEO, 공동창업자가 CTO.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의 엔지니어와 도메인 전문가의 조합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제품 없이" 받았다는 점이었다. 도메인 전문성과 시장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문제 정의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추가 채용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유료 고객이 1개에서 10개로 늘어나면 제대로 된 프리시드 또는 시드 투자를 받고 그때 사람을 뽑을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뽑더라도 AI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7. 고객 발굴은 여전히 수동이다

AI 에이전트 회사를 만들고 있지만, 정작 고객을 찾는 일은 철저하게 수동이었다. 후배가 보여 준 리드 리스트가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고객은 사모펀드 소개. 두 번째 고객도 사모펀드 파트너 소개. 세 번째는 컬럼비아 MBA 네트워크. (졸업생은 아니고 그냥 학교 행사에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네 번째는 투자자의 이전 거래처. 거의 전부가 warm lead였다.


사모펀드를 통한 영업이 핵심 채널이었다. 사모펀드는 청소 서비스, 조경 서비스 같은 프랜차이즈 사업에 투자해서 여러 개를 묶어 플랫폼화하는 롤업 전략을 쓴다. 이런 사모펀드 입장에서 투자한 포트폴리오 회사의 운영 효율을 높여 줄 수 있는 AI 솔루션은 매력적이다. 후배는 이 접점을 정확히 파고들고 있었다.


컨퍼런스도 활용하고 있었다. 참석 전에 누가 오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사모펀드가 어떤 업종에 투자하는지를 조사한 뒤에 간다고 했다. 반면 cold outreach의 반응률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이메일을 보내도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고. B2B, 특히 중견 이상의 기업을 상대하는 영업에서 관계는 여전히 핵이었다.


8.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후배는 현재 뉴욕에 있지만, 이건 벤처캐피탈이 운영하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를 물었다. 후배의 정리가 깔끔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달을 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미친 아이디어, 큰 비전. 뉴욕은 더 다양하고, 사람들이 풀고 있는 문제가 더 practical하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거나, 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뉴욕이 "훨씬 낫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working"이라고 표현했다. 네트워킹이 되고, 고객을 만날 수 있고, 빌더들이 있고, 돌아가고 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뉘앙스였다. 어느 도시가 객관적으로 더 좋은가보다는, 자기 사업에 맞는 도시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는 태도였다.


9. 뉴스보다 고객이 먼저다

가장 최신 테크 인사이트를 어디서 얻느냐고 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후배의 답이 명쾌했다. "나는 테크 뉴스를 그렇게 많이 읽지 않는다. 팟캐스트도 듣고 뉴스레터도 팔로우하지만, 내 시간의 대부분은 고객과 이야기하고 고객을 만나는 데 쓴다."


트렌드를 좇는 것보다 고객의 문제를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뉴스는 흘러가지만 고객의 문제는 남는다. 특히 B2B에서 고객과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의 밀도는 뉴스레터 열 개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폴 그레이엄의 "Do things that don't scale"을 대화 중에 언급했는데, 후배의 현재 상태가 정확히 그것이었다. 스케일되지 않는 방식으로 고객을 만나고, 수동으로 리드를 관리하고, 한 명 한 명 관계를 쌓고 있었다. 자동화를 만드는 회사가 자동화 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었다.


10. 현지인이 된다는 것

대화를 마치면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외국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창업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후배를 보면서 느낀 건, 그녀에게 "미국에서 창업한다"는 프레임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자기가 사는 곳에서, 자기가 아는 분야에서, 자기가 본 문제를 풀고 있을 뿐이었다. 5년간 미국의 소규모 사업자들과 일하면서 쌓은 도메인 지식이 있고, 그 고객들이 여전히 수동으로 일하고 있고, AI가 그 수동 작업을 대체할 수 있다. 그 연결고리가 전부였다.


한국에 앉아서 "어떻게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를 고민하면 시장 조사부터 영업까지 장벽이 한없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이미 그 시장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장벽이 아니다. 현지의 사모펀드를 만나고, 현지의 컨퍼런스에 가고, 현지의 네트워크를 찾고. 해외 진출이 아니라 그냥 사업이다. 외국인이 미국에서 창업하는 방법의 절반은 "거기 있기"였다. 나머지 절반은 도메인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AI의 봄은 아직이다 - 미국 최대 VC (a16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