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는 아니고 그냥 하는 말)
2022-09-22 초고.
1.
얼마 전 생일, 친한 후배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였다.
'난데없이 하루키??'
십 년도 더 전에 '상실의 시대'를 읽어본 것이 내가 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에게는 그저 괴팍하고 야한 소설에 불과했고, 교양은 없었지만 오만함은 넘쳤던 나는 그 명작을 '있는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희대의 걸작을 겉멋의 상징으로 치부한다는 건, 그야말로 무식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가 아닐까? (지금은 하루키의 팬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선물 받은 책이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딱히 하루키가 아니라도 선물 받은 책만큼 읽기 싫은 게 또 있을까. 결국 후배의 성의를 생각해 책을 꺼내 들게 된 건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2.
책은 의외로 쉽게 술술 읽혔다. 한동안 어려운 책들만 골라서 읽었던 터라 이렇게 쾌적하게 읽히는 책은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에피소드들, 그리고 공감 가는 하루키의 생각들에 때로는 피식 웃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읽어 나갔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블로그에 리뷰나 좀 써볼까 했더니, 도통 쓸 말이 없었다. 에세이라는 걸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순간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이 글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 대한민국 도봉구 쌍문동에 사는 회사원 '김철수'씨가 쓴 글이라면, 과연 이렇게 잘 팔렸을까?'
실제 김철수 씨가 에세이집을 출판할 일은 없을 테니 팩트체크는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책을 낸다고 해도 지인 몇 명 정도나 사보겠지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은 전무할 것이다. 설령 그 내용이 이 책과 철자 하나 빠짐없이 똑같다고 해도 말이다.
3.
결국 에세이라는 건 글 자체가 아무리 훌륭해도 글쓴이가 일단 유명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되는 이상한 글이다.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럼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삐뚤어진 감상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주목받지 못한 글은 그 가치를 상실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인생을 살면서 수도 없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 이 자체가 상당히 즐거우면서도 신성한 작업이 아닌가. 굳이 남들에게 말하기 애매한 싱거운 생각부터 인생을 바꿀 순간의 깨달음까지, 우리가 살면서 하는 많은 생각들의 대부분은 결국 빛을 못 보고 뇌 안에서 산화된다. 그나마 입 밖으로 나온 말들도 결국은 세월에 풍화되기 마련이니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4.
분명, 글이란 타인의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말이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언젠가 내가 유명해진다면 지금의 '그냥 하는 말'들이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할지.
물론, 그때까지는 이 글들은 not 'essay', just 'at say' (에세이는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