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행복으로 채우는 기술
2024-08-11 초고.
0.
8월 초,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휴가 직전 무슨 마가 끼인 건지 갑자기 이런저런 악재가 겹쳤다. 잘 가던 차가 갑자기 고장 나서 센터에 들어갔고 며칠 뒤에는 10년 넘게 잘 사용하던 냉장고마저 수명을 다했다. 차량 수리비와 냉장고 구입비로 인해 휴가용 예산은 휴가를 가기도 전에 이미 소진되어 버린 상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째 휴가를 가지 말라는 신의 계시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지출에 간이 콩알 만해진 우리 부부는 휴가를 취소하려 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리 예약한 숙소는 환불이 불가능했다. 어쩐지 다른 곳보다 가격이 싸다 싶었는데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다 싶어 좀 무리를 해서 떠나기로 했다.
사실 쉼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했다. 최근 들어 일에 대한 회의가 점점 쌓이면서 하루빨리 은퇴의 순간이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버티듯이 살고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결국 무엇이었는지 매일같이 고민하고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 쉬면서 머리도 식히고 생각도 정리하고 싶었다.
1.
휴가 첫날, 처가에 아이들을 맡겨 놓고 아내와 단둘이 시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일주일의 휴가 중 절반은 아내와 둘만 보내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던 장모님도, TV와 간식, 다양한 채집 활동이 무제한 제공되는 외할머니댁에 가는 날을 학수고대하던 아이들도, 그리고 오랜만에 신혼 분위기를 만끽할 생각에 신이 난 우리 부부도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윈-윈.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사전에 아이들과 약속한 3박 4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날, 아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다며 오랜만에 영화를 보자고 했다. 아내가 고른 영화는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였는데 시내에 있는 독립 영화관에서만 상영을 하고 있었고 마침 그날이 상영 마지막 날이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독립 영화관은 예상보다 더 노후되어 있었다. 2층짜리 넓은 극장을 다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에어컨의 성능에 극장 안 공기는 눅눅하고 후덥지근했다. 영사기도 오래되었는지 화면도 어둡고 초점까지 잘 맞지 않아 오래 보고 있으면 머리가 다 아파왔다. 하지만 아내와 둘이 보내는 시간은 이러한 사소한 불편들마저 운치와 추억으로 여기게 만든다. 사실 이 영화관의 분위기는 아날로그적 삶이 주제인 영화 내용과도 묘하게 어울려 나쁘지 않았다.
2.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화장실 청소 업체에 근무하는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분)의 일상을 그대로 추적한다. 그는 매일 아침 동네 골목길을 청소하는 이웃의 빗자루 소리에 눈을 뜬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좁은 계단을 내려와 싱크대에서 양치를 하고 콧수염을 다듬고 면도를 한다. 분무기를 가지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와 식물들에게 정성껏 물을 준 뒤,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집 밖을 나선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새벽녘에 출근해 본 경험자로써 그 오묘한 색의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카메라 앵글이 고된 하루의 시작을 암시하는 칙칙한 하늘에서 히라야마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답답했던 내 가슴에 일순 동요가 일었다.
맙소사. 히라야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이제 막 출근하는 사람의 표정이 마치 금요일 퇴근길 직장인의 표정 같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행복하게 웃게 만드는 걸까.
집을 나선 그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한 모금을 마시고 차에 시동을 건다. 골목을 빠져나와 스카이 트리가 보일 때쯤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노래를 튼다.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아날로그 사운드와 어울리는 6,70년대의 올드 팝.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그에게 너무나도 어울리는 곡 들이다.
근무지에 도착한 히라야마는 차에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청소 용구들을 꺼낸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공중 화장실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사용하는 손님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히라야마를 무시하는 손님들의 눈빛과는 정반대로 그의 눈빛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 벤치 지정석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해결한다. 벤치에서 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것이 그의 루틴 중 하나. 그러다가 우연히 나무밑동의 새싹을 발견하면 그것을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파내어 집으로 가지고 가서 화분에 옮겨 키운다.
퇴근 후에는 동네 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역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매일 같은 메뉴를 먹고 레몬 사와를 마시면서 야구 경기를 본다. 그리고 귀가하여 문고판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그의 꿈속에서는 그가 그날 겪고 만난 사람들, 그가 읽은 책 내용들이 오버랩되어 나타나고 그는 다음날 다시 빗자루 소리에 눈을 뜬다.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똑같은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중간중간 소소한 이벤트들이 발생하지만 결국 그의 루틴이 메인 플롯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루하고 초라하게 생각했을 그의 일상이 나에게는 무척 빛나 보였다. 그야말로 '퍼펙트 데이즈'가 아닌가. 영화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는 짧지만 강렬했다.
3.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대부분이 기피하는 일들은 대체 누가 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히라야마처럼 화장실 청소업을 일생의 꿈으로 생각하고 열정을 쏟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물론, 이 영화는 픽션이고 히라야마도 실존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히라야마 같은 사람이 주위에 흔하게 널렸다면 이런 영화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보람을 느끼며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했다. '행복에 있어 어떤 일을 하는지 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는 지가 중요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히라야마의 동료는 일을 정말 대충 한다. 아내는 불성실하게 깐죽거리는 동료의 모습이 극혐(?)이라 했지만 나는 사실 그의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일에 만족을 못 느끼니 자꾸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다른 곳에서 만족을 느끼려는 그의 모습이 나와도 겹쳐 보여 얼굴이 꽤나 붉게 달아올랐다. 나에게 필요한 건 다른 길이 아니라 나의 마음가짐이었을지도 모른다.
휴가 내내 아내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그처럼 즐겁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찾을게 아니라, 내가 일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항상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며 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령이 좋은 편이라 지금까지는 남들보다 적게 노력하면서도 나름 가성비 좋은 성과를 이루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자세가 일에 있어서 만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성과보다는 열정을 쏟고 노력을 한 뒤 얻어지는 내적 만족이 오히려 행복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히라야마의 삶의 방식은 이러한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4.
휴가를 마치고 본업으로 복귀한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나의 일에 전보다 더 많은 열정과 관심을 쏟으려 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귀하게 여기기로 결심했다. 근무 중에 생기는 짬 시간에 예전처럼 다른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리마인드 하는 마음으로 한번 더 책을 폈고, 내 분야가 아닌 이슈들에 대해서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고민하면서 한번 더 공부하고 논문을 검색했다.
조금 이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애정을 가지고 노력을 하니 보람도 생기고 일이 더 즐거워지는 것 같다. 아직까지 히라야마처럼 출근길에 하늘을 보며 미소 지을 내공은 안되지만 확실히 내게도 퍼펙트 데이즈로 가는 길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