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와 나

by 책방삼촌

지렁이와 나


1.

흙 속에 나고 자라

내 훈기와 생명을 갈아 넣었다

흙 속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울었다

흙에서 끝날 운명이었던 나는

젖은 살로 된, 가장 원시적인 도구였다


남은 온몸으로 기어서, 또 기어서

나의 끝만은 내가 정하고 싶었다

숨 내려놓을 곳은

난생처음 다다르는

저 먼 볕이었으면 했다


이곳에서 꿈틀대다 멈춘다

나를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지 마라


2.

갈참나무 두꺼운 그늘 아래

물 한 모금 마시고 지쳐 누웠다

볕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나는 이곳, 고통 없는 그늘이었으면 한다


볕에서 땀 흘리는 강요된 신성함에 지쳤을 때,

이 자리까지 올 힘 정도만 남았을 때,

나는 이곳, 그늘이었으면 한다


고통으로 일렁인다 여겼던 네 몸짓이

실은 환희의 마지막 춤인 것이냐


3.

고단하다

날 더 부르지 마

이제,

그만할 시간이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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