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코벤트리(Coventry) 공항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유럽의 저가 항공 톰슨 플라이(Thompson Fly)에 몸을 실었다.
피카소가 청소년시절을 보내며 교육받았던 곳이자,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세워진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행 왕복 항공권은 미리 예약해 둔 덕분에 그 당시(거의 15년 전) 영국 파운드로 10파운드 내외로 저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지 모른다.
바르셀로나는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 당시 나는 점점 더 여행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여행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나의 신념은 나를 자유 시간이 주어진 휴일과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여행 계획을 짜는 철저한 여행 플래너로 만들었다.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계획하며 우리보다 먼저 다녀온 적이 있는 소정이에게 주요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지도와 여행 책자나 한인 민박집 카페에 실린 정보가 다였기 때문이다.
소정이는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를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의 소매치기 수법이 얼마나 놀라운지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 했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이용해 미리 예약해 둔 한인 민박집을 찾아갔다. 소매치기가 많고,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 여행 정보를 얻고 싶어 바르셀로나로나 도심 안에 있는 한인 민박집을 예약했다. 우리는 지도를 들고 무사히 민박집을 찾았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객이 방금 전 민박집을 찾아오는 길에 어떤 두 남자를 만났는데 소매치기란다. 길을 물어와서 지도를 살피고 있는데, 그들이 그만 다리 옆에 잠깐 놓아둔 가방을 들고 튀었다는 것이다.
영국에 있으면서 다양한 소매치기 수법과 당할수 밖에 없는 여러 일화들을 듣고 들었기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동안 조심 또 조심했다. 즐겁고 낭만에 가득 찬 여행길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박 4일을 보내는 바르셀로나 여행 기간 중에 여권을 민박집주인에게 맡겼다. 여권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너무 쉽게 생기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방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동생과 첫 영국 여행을 갔을 때부터 나는 키플링 크로스백을 좋아했다. 가볍고 예쁘다.
2004년 영국 런던행 비행기를 타러 출국장을 들어설 때 배웅 나왔던 일행 중에 꼬맹이 조카가 있었다.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조카였는지, 먼 타국땅을 향해 떠나는 이별의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때 메고 있던 파란색 키플링 크로스백에 걸린 고릴라를 떼어 조카 손에 쥐어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를 위한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고릴라 한 마리를 주는 그 행위 하나에 스스로 위안을 받았던 거 같다.
키플링 가방의 귀여운 고릴라(출처. 키플링 공식몰)
하루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민박집에 모인 여행객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소매치기를 당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서로 조심해야 한다면서 위로 아닌 위로와 격려를 하며, 한인 민박집에서 낯선이들이지만 여행객의 이름으로 서로를 챙겼다.
당시에 유일하게 우리만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고 있었고, 다들 조심하라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 면에서 유럽 대도시에서는 한인 민박집을 이용하는 것은 여행하는 동안 좋은 안식처가 되게 하기도 한다.
여행 마지막 날을 앞두고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건축하다가 미완성으로 생을 마감한 성가족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Bacilica de la Sagrada Familia)'에 가기로 했다.
바르셀로나로나 여행은 가우디의 건축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가우디의 손길이 닿았던 곳곳을 찾아다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보물 같은 곳이니 일단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가 보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가장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고 해서 바르셀로나로나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을 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 하는 거였다. 그때 일이 생겼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는 방법(출처, 공식 홈페이지)
키플링 크로스백(그 당시 내가 메고 다니던 연두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안에 디지털카메라와 여행 경비, 비상시를 대비한 여권 복사본을 넣고는 어깨에 가방끈을 걸치고 가방을 앞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과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멀찍이 서서 우리를 쳐다보던 루마니아 집시 여성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냥 사람 구경을 하며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사람들이 루마니아 집시들이구나. 왜 저기에 서서 날 쳐다보지? 뭐 서로 구경하는 거지 뭐.'
그러고 보니 당시 지하철을 기다리던 인파 중에 동양 사람은 우리가 유일했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행지에서도 동양인으로 눈에 띄어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곤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승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한산한 편이었다. 남편과 같이 승객들을 따라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내 앞이 꽉 막혔다. 남편은 이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빨리 들어가서 남편의 옆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좀처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순간,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누군가 내 키플링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재빨리 가방 속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하철 안에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아줌마, 지금 뭐 하세요?"
아까 나를 쳐다보던 루마니아 집시 여성들이었다. 두 명은 나를 에워싸며 몸을 내게 밀착시켰고, 나머지 한 명은 내 가방 속에 손을 집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집시 여성은 내가 꽉 움켜쥔 손을 놓지 않으니 슬그머니 손을 펴며 내 가방에서 손을 뺐다. 그러자 다른 두 여성도 내게 길을 내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얼른 남편 옆에 앉았다. 떨려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집시 여성들을 다시 쳐다볼 수 없었다.
"이번 정거장에서 내렸어."
남편이 눈을 뜨지 못한 채 떨고 있는 내게 이제 괜찮다며 안심을 시켜줬지만, 벌렁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쳐 유럽과 영국을 여행했었지만, 소매치기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후에 남동생에게 이 일화를 전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손을 잡아, 그 사람들이 면도칼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큰일 나려고. 진짜 겁이 없네."
"그러게, 카메라 가져갈까 봐..."
"카메라가 대수야? 몸 안 다쳤으니까 감사해야 해."
사실 나는 겁이 많다.
오래전 성탄절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칸타타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바로 집 앞에서 중학생 꼬맹이들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며 내 가방을 빼앗아 간 적이 있다.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대성통곡하며 겁에 질린 채 울었다. 다행히도 아버지와 남동생이 나가서 골목에 버려진 내 가방을 찾아오시긴 했지만, 그날의 공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슬쩍 내 엉덩이에 손을 대던 낯선 남성들, 티켓 창구에서 느껴졌던 그 공포의 손길들. 너무 두렵고 소름 끼치는 경험이 나를 겁 많은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닐까?
지금도 시골에 들어와 살면서도 남편이 부재중일 때는 딸아이와 함께 친정집에 다녀오곤 한다. 시골집에서 혼자 아니, 아이와 지내는 것도 겁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결혼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가끔 생각난다.
그 루마니아 집시 여성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나와 같은 표적을 찾고 있을까?
후에 유럽 여행 중에 키플링 크로스백을 메고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루마니아 집시 여성들의 표적이 된 게 바로 그 키플링 가방이었을 거라고.
암튼 난 지금도 키플링 가방을 좋아한다. 종종 키플링 크로스백이나 가방을 들고 다니며,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던 루마니아 집시 여성들을 기억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