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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바산트 쿤즈 A블록

다사다난했던 그곳

by 샨띠정

이사하고 나서 첫 번째 봄을 맞았다. 인도의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왔다. 델리에서의 봄은 계절을 가장 즐겁게 누리며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시절이었다. 나는 햇살이 따스해지고 분홍 페튜니아 꽃과 흰색 데이지 꽃, 키가 큰 달걀 프라이 모양의 쑥갓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A 블록 안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A 블록의 최대 장점 하나가 단지 가장자리 안에 큰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가 그곳으로 이사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는 세발자전거 뒷좌석에 작은 축구공 하나를 싣고는, 살갗을 간지럽히는 봄 햇살 속에서 신나게 놀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나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적어도 기온이 37도가 올라갈 때까지는 거뜬히 바깥에서 놀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샤이니를 포함해 동네 아이들은 높은 기온에 상관없이 봄과 함께 시작된 더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공원 안의 작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기도 하며, 배드민턴을 치고, 크리켓(Cricket, 인도와 영연방 국가에서 즐겨하는 야구와 비슷한 스포츠로 11명이 팀이 되어 경기로 인도에서는 열광적인 인기를 끄는 운동 종목으로 골목마다 아이들이 모여 크리켓을 즐긴다.)을 하며 뛰어놀았다. 아이들은 물 한 병씩 들고 나와 한쪽 구석에 물병을 줄지어 놓고 있다가 수시로 들이키기를 반복하면서 타는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더 뜨거운 여름빛이 오기 전에 최대한 즐기며 놀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지켜가는 듯했다.


가끔은 이렇게 재미난 놀이 시간에 원숭이 가족들도 공원에 출현할 때가 있었다. 사람들이 놀고 있는 공원에서 유유히 그것도 길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 구경을 하는 원숭이 가족을 가능한 멀리 서서 지켜보는 두려움 섞인 구경거리도 재미를 더했다. 종종 이 큰 공원을 가로질러 공원 너머에 있는 가게에 장을 보러 가곤 했는데, 원숭이 가족을 만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니곤 했다.


우리는 미스 유니버스(세계 미인대회)에 출전한 미스 인디아(Miss India)에 뽑힌 아름다운 여성이 나오고, 의사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델리 남쪽 바산트 쿤즈 A 블록(Sector A)으로 이사했다. 남델리 바산트 쿤즈는 인드라 간디 국제공항(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과 가까웠다. 새로운 상업적 신도시로 개발된 구르가온(Gurgaon, Commercial Hub)과 경계를 이루며 바로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또한 델리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디엘에프(DLF Ambience Mall, DLF Promenade Mall)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새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쇼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태국과 두바이로 쇼핑 여행을 다니던 인도 갑부들이 인도에서도 마음껏 쇼핑할 장소가 생겨 좋아했다는 곳이다.


뒤쪽으로는 네루 대학교(JNU, Jawarlal Nehru University, 진보적인 대학교로 종종 대자보를 붙이거나 데모하는 인도의 명문 대학교) 교정이 큰 산을 덮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보통 한밤중에 하기에 보기 어려움)과 착륙을 할 때 JNU(제뉴)를 구경하곤 했다. 가끔 우리 가족은 델리 맛집으로 소문난 네루 대학교 내의 학식을 먹으러 가곤 했다. 무엇보다 저렴하면서도 맛이 보장된 곳이었다. 나중에는 TOPIK(한국어 능력 시험) 장소로 토픽시험 감독을 위해 정기적으로 갔었다.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 축제나 한국어 말하기 대회, 한국노래대회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하곤 했던 그리운 대학교다. 네루 대학교라 부르기도 하고, 보통 JNU(제뉴)라 불린다.

딸아이는 네루 대학교 교수로 있던 이 교수님의 도움으로 대학교에서 운영하던 태권도 수업에 참여하여 품새를 배우러 다녔다. 후에 우리가 다시 주 인도 한국 문화원 근처로 이사하고 나서도 한국 문화원에서 태권도 수업을 받다가 크게 구령을 외치던 인도 사범의 목소리에 울음을 터트려서 태권도와는 작별을 고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예상치 못했던 여러 문제에 마주하며 우리는 그 집에서 2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지만, 좋은 점이 많았던 곳이다. 그곳에 사는 동안 많은 가까운 지인들이 방문해서 묵고 갔던 복된 터전이었다. 우리가 살던 A 블록은 바산트 쿤즈 DDA(Delhi Development Authority Government og India, 1957년에 델리의 주택 건설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한 인도의 주택 개발 단지) 중에서도 가장 일찍 오래전(1990년대)에 계획적으로 지어진 노후된 거주 단지였다. 아이가 어려서 유모차를 들고 오르내리기가 어려워 1층(인도식으로 Ground Floor)에 집을 구해 아이와 함께 들고나기가 편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맞닥뜨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바산트 쿤즈는 하루에 한 번씩 물을 받아 사용하는 물탱크가 옥상이 아닌 바로 집옆 마당뒤쪽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위에 목이 마른 원숭이가 열쇠가 잠기지 않은 어느 집 물탱크에서 물을 마시다가 물탱크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물탱크에 꼭 자물쇠를 잠궈두라는 권고와 함께.


한 번은 같은 블록에 살던 의건이 집에 한국에서 한 교회 집사님이 방문하셨는데,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을 보고는 눈물을 쏟아내셨다고 한다. 한국의 쾌적한 아파트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기에도 적합하지 않게 보이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 집에 오셔서 눈물을 보이신 분은 없었다. 단 홍동완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셨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방문하셨던 홍 목사님은 바산트 쿤즈를 돌아보시더니 인도가 중국보다 더 개발이 안 되어 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중국에도 여러 차례 다녀오셨던 터라 아무래도 바로 인도와 비교가 되셨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좋은 곳에 살고 있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은 달랐다. 온통 회색빛과 누런 먼지로 뒤덮인 먼지투성이 건물들과 포장이 안 된 흙길을 지날 때마다 울퉁불퉁하여 덜커덩거리며, 수시로 흙먼지가 날려서 얼굴을 수건으로 뒤집어써야만 했다. 눈과 코,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최대한 보호한다고 해도 그 많은 먼지를 이길 힘은 부족했다. 쾌적한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던 그곳이 낙후되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은 홍 목사님이 일행과 함께 우리 집에 오셨다가 우리가 미처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던 생쥐들을 소탕해 주셨던 적도 있으니 더욱 그러지 않으셨을까?

사실 우리가 살던 A 블록 1450번지는 이사하면서부터 여러 문제가 앞다투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1층이나 4층 꼭대기 층 탑 플라워(Top floor)에는 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들었지만, 아이와 함께 유모차나 세발자전거, 20리터 마실 물통을 들고나가기 편하도록 마땅한 집이 없어 1층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에서 자고 있던 우리는 갑작스럽게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깼다. 붙박이장 옷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옷걸이에 옷을 두었는데, 옷걸이가 부서지며 걸려있던 옷들이 바닥으로 우두둑 옷걸이와 함께 떨어지고 만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도 굴지의 건축 회사인 V사 중역이던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바로 원인을 찾아냈다. 바로 흰개미(Termite, 나무를 닥치는 대로 갉아먹는 습성이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서식하지 않는 종이지만 가끔 뉴스 기사에 나오는 유해한 곤충)가 나무로 만들어진 안방의 옷장을 갉아먹은 바람에 옷걸이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었다.


옷장을 손으로 톡톡 두들겨 보니 ‘텅텅’ 빈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옷장 나무의 속이 다 비어있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우리는 옷장 바로 옆 침대 위에 누워 곤히 자고 있을 때, 흰개미들은 도둑처럼 들어와 옷장 속에서 나무를 맛나게도 다 갉아먹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가 오싹 해졌다.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샤이니는 이제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필이면 흰개미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다니. 앞이 캄캄했다. 피하고 싶은 현실 앞에 마음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인도에서 살면서 가장 피해야 할 공포의 주택 1순위가 흰개미가 있는 집이다. 종종 이 흰개미의 공격으로 싱크대 상부장이 무너져 내려앉기도 한다. 거기에다 인도 부자들이 침대 밑 서랍이나 벽장에 현금을 쌓아두고 살다가 어느 날 감쪽같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니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른다. 이 불청객 흰개미로 인해 집안의 모든 붙박이장과 서랍장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집도 있다. 이 곤충은 종이도 좋아한다. 책꽂이에 꽂힌 책에 들어가 단숨에 먹어 치우기도 한다. 읽으려고 꺼낸 책이 표지만 남긴 채 안이 텅 비어있는 황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이 천하무적의 흰개미의 피해를 보는 집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정기적으로 주택의 흰개미 퇴치를 위해 방역을 해주는 업체가 있다.

이사와 방역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다가 흰개미를 없애는 방역을 하기로 선택했다. 집 안 곳곳에 숨어있는 이 불청객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아주 독한 약으로 집안 전체를 소독해야 해서 우리는 집에 거주할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 머물러야 할 상황이었는데, 의건이 집과 에스더 사모님 댁에서 불러주셔서 함께 머물며 사랑의 신세를 졌다. 우리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다 빠진 후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곰팡이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거실과 방에 있던 모든 수납장과 벽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수납장에 들어간 모든 물건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칸은 그냥 비워두기 시작했다. 안방과 거실, 부엌에는 창문이 있었지만, 열 수가 없었다. 집이 1층이다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집 안을 훤히 볼 수 있으며, 하염없이 날리는 먼지가 속수무책으로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커튼을 치고 창문을 닫고 살아야만 했다. 바닥은 1층이라 습하고 햇볕이 들지 않아 상황은 날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피부병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 앞섰다. 신발장에 넣어둔 신발에도 온통 곰팡이가 피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다가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놀라서 우당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밖으로 피신했다. 거실에 깔려있던 사각형 대리석 타일이 우두두 큰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집이 무너져 내려앉을까 봐 아이를 부여잡고 뛰쳐나왔는데, 다른 집들은 아무 요동이 없어 의아했다.


델리에 있으면서 몇 차례 지진을 감지해서 식탁 아래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피하기도 하고, 주 인도 한국 문화원에서 수업하던 중에 건물이 흔들리고 책상의 물컵이 미끄러져 내려 모든 직원과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 대피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지진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큰 바닥 타일들이 깨지고 어긋나 있었다. 바닥에 습기가 가득 차올라 타일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모두 들춰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나라처럼 바닥에 보일러나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으니 바닥 타일이 1년 내내 축축한 상태로 습기를 머금고 있었던 거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사실 인도의 대부분 주택은 바닥을 타일 대신 콘크리트나 천연 대리석으로 깔아 놓는다. 특히 주택의 1층은 타일을 깔면 안 되었다.


거실 바닥을 다 뜯어내고 대대적인 공사가 들어갔다. 안방에서 겨우 잠을 자며 길고 긴 공사 기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마침 그때 미국인 친구 로라가 살고 있는 집의 위층 집이 비어있다면서 이사를 권유했다. 그렇게 바산트 쿤즈 A 블록에서의 우리의 삶은 마침표를 찍었다. 캐나다인 모르몬교 선교사가 살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비어있던 집, 라즈빳 나가르(Lajpat Nagar, 1947년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될 당시 펀자브 난민들을 위한 거주지로 정해주었던 곳이며, 시크교도들과 아프가니스탄인 및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북한 대사관 직원도 거주하고 있어서 가끔 가게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다. 스타벅스가 들어왔다가 망하고 문을 닫은 유일한 곳이 아닐까? 우리에게 종종 스타벅스에 가는 기쁨을 주었던 곳이며 센트럴 마켓이 있어서 늘 볼거리가 다양하고 즐거웠던 우리의 고향)는 우리의 마지막 집이 되었다.

그곳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6년을 거주했다. 같은 건물 2층의 로라와 마이클, 4층의 에드윈과 게일 가족은 인도에서의 우리 가족이자 형제자매이며, 친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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