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지 말기
종종 우리는 쪼잔해지곤 한다. 때론 마음이 바다처럼 드넓고 깊은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아지는 마음 구석을 마주하는 게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우리 삼 남매에게 간식거리를 챙겨주시곤 하셨다. 여닫이문이 가로막고 있는 안방 위 작은방에는 강냉이 옥수수 튀밥부터 사과 상자와 귤 상자, 고구마나 땅콩, 알밤이 쌓여있었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유과와 강정, 떡도 자리를 차지했다. 안방보다는 서늘하여 과일이나 과자가 신선하게 보관되기엔 최적의 요건을 갖추었을 게다. 특히 늦가을부터 그다음 해 봄이 오기 전까지.
엄마는 안방에 우리 삼 남매를 앉혀놓고는 손에 사과를 하나씩 쥐여주며 먹으라 하셨다.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때론 귤을 주셨다. 큰 바구니에 강냉이 튀밥을 담아 주시면 숨겨져 있는 떡국 떡 튀김을 찾아 먹었다. 때론 아버지 손에 의지한 아빠만의 맥가이버 칼에 의해 고구마가 깎이고, 삶은 알밤의 껍질이 벗겨졌다. 우리는 어미 새의 먹이를 받아먹으려는 아기 새들처럼 입을 벌리고 순서를 기다렸다.
문제는 엄마가 사과를 주셨을 때다. 나는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나가기가 무섭게 남동생의 사과를 잡아채서 내 거와 크기를 비교했다. 왠지 아들을 더 귀히 여기는 엄마가 아들인 남동생에게 더 큰 사과를 줬을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작은 손에 들려진 사과는 더 커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실제로 내 거와 비교해 보면 누구의 것이 더 큰 지 구분하기가 어려워 사과가 몇 번을 남동생과 내 손을 옮겨 다녔다. 결과적으로는 처음 받았던 내 사과를 내가 먹곤 했다. 아무리 봐도 내게 주어진 사과가 더 크고 먹음직했기 때문이 아닐까? 뭐니 뭐니 해도 내 것이 최고라 여겼을 것이다.
그 후로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또 다른 사과를 보면서 비교하는 습관을 못 버린 모양이다.
종종 나는 선교지에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보면 부러움에 입술을 깨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주님 앞에 물으며 떼를 쓴다. 가슴 아래서는 이곳보다 선교지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왠지 지금 내 모습이 초라하고 형편없어 보이는 게 싫어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달란트. 주인이 이웃 나라에 가는 동안 종들에게 잘 경영하라고 각각 달란트를 맡기는데, 그 금액이 동일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이에게는 두 달란트를,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기 다르게 줬다. 각기 재능에 따라. 능력에 따라 분량에 맞게 주어진 것이다.
요즘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의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얼마인지 계산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나도 달란트를 받은 자가 아니겠는가? 다섯일 수도, 두 달란트일지도, 어쩌면 한 달란트 받은 자일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여 보는 이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다. 안전하게 잃지도 더하지도 않게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떼 땅속에서 꺼내온 한 달란트를 그대로 정산했던 그 종을.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 열 달란트로, 열심히 수고하여 두 달란트를 더 남겨 네 달란트로 만들어낸 다른 두 종들의 모습과 확연하게 비교가 되는 인물이다.
비록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한 달란트라 할지라도 나는 수고하고 열심을 내겠노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하며 독백을 한다.
얼마 전 친구에게 땅이 꺼져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말.
"정*경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지. 바로 그곳이 거룩한 땅이야. 거기가 사역지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참았다.
목이 메어오는 것을 힘껏 누르며 대답했다.
"그치? 맞지?"
그녀가 맞장구쳤다.
"그럼, 맞지. 정*경이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지."
귓가에 맴도는 격려의 말에 끝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최근에 부쩍 선교사님들을 여러 분 만났다. 인도에 오신 선교사님들,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언니, 스리랑카에서 온 샤론 언니도.
나는 그들에게 자신 없는 얕은 목소리로 확언을 듣기 위해 물었다.
"저 잘 살고 있는 거 맞죠?"
"그럼요, 하나님과 함께 하면 잘 사는 거예요."
돌아오는 답변이 명료해서 좋다.
북카페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기다리고, 설거지를 하며, 커피를 내리고 청소하는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는 잘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엊그제 하늘이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들렀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젊은 엄마인데, 한때 교회에 나가다가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다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던 터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그녀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하늘이가 어린이성경을 받았는데 너무 열심히 읽으면서 자꾸 물어보는데, 아는 게 없어서 대답을 못해줬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빨리 교회에 나가야죠. 같이 교회 가요."
뜻밖에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그녀.
"저 향상교회 등록했어요. 교회가 건강하고 참 좋아요."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는 혜* 씨와 하늘이 엄마가 교회에 다시 나가면 좋겠다고, 기도하자고 한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믿기지가 않았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너무 놀라서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정말 교회 갔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너무 기쁘네요. 진짜 잘하신 거예요."
"네, 좋아요."
잠시 후에 약속을 한 듯 준서 엄마 혜* 씨도 아이들을 데리고 북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다란 갈색 원목 테이블에 아이들과 둘러앉았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도, 아리따운 두 여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제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내리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벅찬 가슴이 차오른다.
책꽂이에 진열된 책을 보며 묻는다.
"교회 다니세요?"
"네, 맞아요. 교회 다니세요?"
문학과 비문학, 종교 신앙서적까지 다채롭게 있다 보니 자연스레 기독교 서적이 눈에 띄는지 종종 자주 물어온다. 그리고 마음속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도 가끔 만난다. 교회가 아닌 곳에서 자연스레 자신들의 얘기를 나누기 원하는 이들이 자녀들을 위한 고민과 더불어 세상 여러 짐들을 꺼내 놓는다. 누군가는 고향에서 올라오신 아픈 친정 엄마를 보필하느라 지치고, 또 누군가는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버겁다. 학업의 짐에 눌린 고뇌 속의 곤궁한 청소년들도, 이곳을 찾는 모두가 나의 이웃임을 상기한다. 바로 그들이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아닐까? 감히 부족한 내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다시 한번 다짐한다.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달란트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내게 주어진 작은 달란트를 귀하게 여기며 일구어 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달란트를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