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목소리가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가 고속도로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달렸다. 용인과 서울의 경계선을 지나며 온통 빌딩 숲으로 변하고 있는 테크노밸리를 바라보던 순간. 전화기가 손바닥 안에서 웅웅거렸다. 진동으로 울려대는 작은 액정 화면에 낯선 발신자 번호가 떴다.
얼마 전에 교회 부목사님께서 한번 꼭 만나보라며 건네주신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와 이름을 저장해 두었더라면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으리라. 나는 낯선 번호의 수신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다. 계속 진동소리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그 작은 진동을 견디다가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러 수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은* 씨세요?"
"네, 누구세요?"
"아, 저는 얼마 전에 최 목사님 통해 연락처를 받은 김**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좋았다. 맑고 경쾌한 게 둔탁한 버스 안 공기를 금세 상큼하게 바꿔놓은 듯했다.
"혹시 언제 시간이 괜찮으세요? 뵙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버스 안이라 통화가 어려워서요. 다음에 다시 연락 주시겠어요?"
나는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꽤나 상큼하고 다정함이 묻어나는 생기 있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 내고도 뇌리에 남았다. 얼굴도 보기 전에 목소리로 그 사람을 예단할 준비가 되어 버린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몇 번의 전화 통화만 하다가 마침내 그를 대면하여 만났다.
커피숍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아 그와 마주 앉았다. 목소리 첫인상이 너무 좋았던 터라 그의 외모는 목소리를 이기지 못했다. 뭐, 20대 초반에는 별명이 리처드 기어였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리처드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리처드 기어도 이겨버린 격이다. 깍지를 낀 그의 손가락은 유난히도 굵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두 번은 만날 일 없겠다.'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온 후, 고맙게도 그는 내게 연락을 자주 해왔다. 목소리가 내 마음속 결심을 이겼다. 나는 한 번만 다시 만나보겠다며 나를 설득시키고, 다시 한번 그를 만나서 지금 현재까지 같이 살아가는 부부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의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결혼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20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조용한 버스 안에서 들었던 그 상큼한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그 칼칼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철렁 내려놓게 할 거라는 것을.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낭만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지금 나는 남편의 목소리가 올라갈 때면 가슴을 조아린다. 제발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보통 사람들보다 더 또록또록한 목소리를 가진 남편이 흥분해서 얘기할 때는 내 귀가 발작을 일으킨다. 윙윙거리는 마이크 스피커 소리만큼이나 내 귀에 크게 들리는 걸 어떡하겠는가?
제발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말해달라고 부탁을 넣어두고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기다려도 내게 돌아오는 소리는 여전히 크다. 원래 그러는 걸 어떡하느냐고. 오히려 이해하라고 다그치는 그 목소리가 오래전 그 목소리가 아니던가?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설명 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