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과 초등학교 1학년 아이
지난 5월 북카페를 이전하면서 1톤 트럭에 책을 실어 버렸다. 벽을 의지한 채로 굳건하게 서있는 책장들은 왠지 모를 위안과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꼭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위압과 강요가 마음을 누르기 때문이다.
"은경아, 북카페의 북을 빼, 그래야 수다 떨러 편하게 갈 수 있거든. 책이 많으면 괜히 부담스러워서 커피 마시러 가는 게 좀 그래."
이전을 앞둔 내게 친구 몇몇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그 말도 맞았다. 책이 아무리 많아도 책장 속에 고이 자리 잡은 그 책을 꺼내어 읽어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수많은 책들은 장식품이나 인테리어 역할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를 다 했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새로 자리 잡은 용인 신동백에는 책이 확 줄었다. 눈물을 머금고 트럭에 실려나가는 책을 못 본 척했으니까. 나름 내 손끝을 거쳐 선별되어 따라온 이들만이 북카페의 벽을 등지고 서서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일까? 북카페에 책이 생각보다 적다고 말하는 분들과 여전히 책이 많아서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부담스럽다는 분들이 함께 공존한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 교차되는 공통분모를 찾아가고 있다.
"커피와 음료를 드시는 곳이 맞아요. 그런데 책도 있으니 사셔도 되고, 읽으셔도 되니 편하게 대화 나누세요."
나는 북카페와 카페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손님들에게 꿈꾸는 정원, 이 공간을 소개한다. 누구든 많이 오셔서 준비해 놓은 이 공간을 누리시길 바라면서.
이제 6개월이 지났다. 푸르르고 꽃들이 가득한 5월을 지나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길가의 가로수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도 안녕을 고하고, 낙엽을 다 쏟아내 버리듯 내팽개쳐진 계절을 지났다. 함박눈의 폭설이 첫눈이 되어 내린 겨울이 내 앞에 서 있다. 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이들의 옷이 몇 차례 바뀌었다. 강아지들도 이제 패딩을 껴입고 산책길에 함께 하는 추위가 왔다. 횡단보도에 서서 1분 30초의 시간 동안 초록불을 기다리는 이들의 외투는 무채색으로 두터워진 지 오래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고 나는 북카페 창가에 앉아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2025년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채로.
어느덧 이곳엔 단골손님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손님들이다. 내게 위로를 주고, 마음을 만져주며 웃음 짓게 하는 이들. 그들을 좋아한다. 나는.
어제의 북카페 일상도 평범하지 않게 흘렀다. 언제나 무언가가 새롭게 첨가되는 나달들 중의 하나, 첨가제가 뿌려져 맛을 나게 하고, 오래 가게 하는 그 오묘한 무엇이 되길 바라는 북카페 지기의 소망을 알기라고 하듯이 말이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바깥은 어둠이 깔리고 불빛이 더 아름다움을 발한다. 그쯤이면 한 번쯤 북카페에 들러주는 이들이 있다. 어제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작은 얼굴에 말소리가 유난히도 깜찍한 1학년 여자아이 하린이는 꿈꾸는 정원을 좋아한다. 가방 속에 바리바리 이것저것 놀 거리를 챙겨서 외할머니 권사님의 손을 잡고 일과를 마칠 즈음의 그 시간에 들렀다. 외할머니의 가방 속에는 회색 푸들 실버 토이푸들 로미가 고개를 내밀며 혓바닥으로 튀어나오는 미소로 인사한다. 우리는 이 모두를 좋아한다. 아니 그 가족 모두를.
얼마 후, 고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 둘이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딸아이의 친구들이자 매주 목요일 저녁에 독서 낭독 모임을 하는 귀한 학생들이다. 책 읽는 날이 아니어도 시간이 날 때면 이곳이 아지트가 되어 불쑥불쑥 찾아오는 아이들. 지난 첫눈 오던 날에는 강아지들이 되어 벅차오르는 그 흥분과 감정을 주체할 줄 몰라하며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개구쟁이 고등학교 1학년생들은 나의 또 다른 아들들이 되었다. 가끔 진짜로 농담을 섞어 '어머니'라 부른다. 아들 없는 내겐 횡재다.
해가 진 겨울 저녁에는 핫초코를 먹어줘야 한다며 달달한 핫초코에 하트 모양의 달콤한 마시멜로를 올려 한 잔씩 건넸다. 호호 불어가며 뜨거움을 식히다가 하린이에게 물었다.
"오빠 두 명 중에 누가 더 잘 생겼어? 누가 마음에 들어?"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빠가 있는 하린이는 '우리 오빠가 잘 생겼다'라고 대답했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오빠를 불러오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깜찍한 그 대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곁에 있던 외할머니 권사님이 '너는 맨날 오빠 못생겼다고 하면서 여기서는 오빠가 잘 생겼다고 하네.'라고 반문하자 큰소리로 웃어 위기를 모면하는 1학년 꼬마 여자아이의 '까르륵' 소리가 북카페 천장까지 차올랐다. 춤을 추듯 웃음소리가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모두의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러지 말고, 여기 있는 오빠를 1, 2로 정해서 대답해 보자. 응?"
다시 한번 설득해 보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굴리면서 두 오빠를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오빠들은 안달이 났다.
"나 상처 안 받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그게 뭐라고, 속이 타들어가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들의 마음을 몰라주고는 끝내 대답을 주지 않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의 대화는 진전 없이 끝나 버렸다. 실망이 어린 얼굴을 애써 물리며 먼저 문을 열고 일어나는 할머니 권사님과 하린이의 퇴장을 바라보는 키 큰 남자아이들에게서도 귀여움이 묻어났다.
같이 문을 열고 따라나서 인사를 나누고 밤길을 걸어 올라가던 하린이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1번 이요!"
"나도 1번!" 외할머니도 덩달아 대답을 휙 던져 왔다.
"아, 네~ 하하하"
북카페로 돌아오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한테 대답해 줬어."
"정말요? 말해 주세요. 제발~"
"아니, 말해줄 수 없어."
"제발요. 절대로 상처 안 받아요."
"그래? 진짜지?"
"네, 네, 네....." 이 두 키 큰 남학생들이 아우성이었다.
"1번이래."
"누가 1번이죠? 제가 1번이에요."
"아니, 제가 1번이에요."
"암튼 난 몰라. 1번이래."
서로 자기가 1번이라고 싸움이 붙었다.
문을 닫고 차가운 밤을 가르며 자동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근처 아파트 입구에서 내려줬다. 마지막으로 내리는 진짜 1번에게 웃으며 대답을 던졌다.
"네가 1번이란다."
"아, 진짜요? 아니죠? 괜찮아요. 저 상처 안 받아요. 하하하"
내심 좋아하면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둠은 바로 앞에서 더 짙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앉아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방긋 웃어 보였다. 참 좋다. 겨울이어도 좋다. 함께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