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외모와 성격, 강점과 약점들이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고, 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텃밭에 열린 토마토만 보아도 그 모양과 색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각 붉게 물들어가는 토마토는 신비하리만큼 다양하다. 보통 때 토마토의 모양은 다 거시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던 셈이다. 창조주의 놀라운 솜씨와 능력에 감탄과 감사가 절로 나온다.
나는 한 때, 콤플렉스 때문에 마음 힘들어하며, 얼굴을 붉히고 눈물짓기도 했다. 이 세상에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로 인한 조화로운 하모니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다.
우리 엄마는 오래전부터 소문난 부잣집의 둘째 딸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대지를 다 빼앗기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진 외가에서 엄마의 꿈을 다 펼치시진 못했지만, 엄마는 늘 앞서 가시고 주도적인 현명한 여인이셨다.
나는 그런 엄마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리며 자랐다. 그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때 나를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해주신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전공하는 음대는 꿈도 꾸지 않았다. 부잣집 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념을 했지만,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문학의 밤
그래서 교회 행사, 문학의 밤이나 성탄절 때 피아노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 후로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교회에서 성가대와 찬양팀, 어린이 성가대 지휘 등을 쉬지 않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해왔다. 옛날에는 피아노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 콤플렉스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주변에 음대에서 전공자들이 나오면서 나의 역할은 성가대 부 반주자, 부지휘자였다. 나는 늘 두 번째 세컨드(Second)였다. 그것이 싫었다.
반주자나 지휘자가 급한 일로 못하게 되면 나는 아무 예고도 없이 부 반주자와 부지휘자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아무 준비나 연습도 없이 하다 보니 삑싸리가 나고, 틀리고, 제대로 못 따라가는 상황이 펼쳐지곤 했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도망치고 싶어 지며, 심지어 평소에 연습해두지 않은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했다.
나의 이런 콤플렉스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콤플렉스는 인도에 가서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반주자가 없는 인도 교회에서 반주로 섬길 수도 있었고, 인도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치면서 한국 노래를 가르쳐주며 내 생애에서 정말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야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작은 재능과 기술도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그리고 전공을 하고 안 하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칠 수 있었기에 나는 반주자가 없는 곳에서 예배 반주를 했고, 한국과 음악을 사랑하는 인도 학생들에게 피아노에 맞춰 노래를 가르쳐줄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콤플렉스는 없다. 목소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제대로 발성이 안 되고, 내가 더 멋진 반주를 못하더라도 찬양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좋고 감사하다. 찬양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그 자체로 기쁘고 좋을 뿐이다.
내게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이끌어주신 우리 엄마에게 마음 깊이 감사한다. 우리 엄마는 정말 멋지신 분이다!!
비록 잘 못하지만, 지금도 교회에 가서 성가대로 봉사하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 다 와서 내가 설 곳이 없어서 아쉽다. 코로나 19도 끝이 나고, 교회 문도 활짝 열려서 성가대로 봉사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