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땀 흘리는 걸 좋아한다. 힘주어 페달을 밟을 때, 꿈틀거리며 달아오르는 허벅지 근육과 그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땀방울이 흐뭇하다. 흡연자들이 흡연의 장점으로 ‘한숨이 눈에 보여서’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랄까. 내뱉는 담배 연기가 한숨의 증거가 되듯, 땀을 흘린다는 건 부지런히 몸을 부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계점까지 육체를 몰아붙일 때 도리어 맑게 개는 정신의 평화 속에서 나는 편안하다.
땀 흘리는 걸 좋아하다보니 땀과 관련해 남에겐 말 못할 은밀한(?) 취미도 하나 생겼다. 운동 후 땀에 젖은 운동복을 자취방 빨래통에 넣으며 작은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별난 취미 때문인지 수년간 헬스를 하면서도 헬스장 샤워실에서 씻은 적이 없다. 헬스장에서 샤워를 하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그럼 땀에 젖은 내 운동복이 처음으로 들어가게 될 곳은 빨래통이 아닌 헬스 가방이 될 테니까 말이다. 땀내 나는 운동복을 집 빨래통에 덩크슛하듯 던져 넣고서야 샤워하러 가는 27살이라니.
운동이 취미인 친구들에게 공감을 시도해 봤지만 당연히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반응만 돌아왔다. 땀이 나면 찝찝하기 마련인데 빨래통에 빨랫감 쌓이는 거 하나 보자고 그 찝찝함을 집까지 견디는 게 제정신이냐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찌푸려진 미간은 내 말이 전혀 공감 받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의 은밀한 취미에 대한 고백을 들으신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마디를 던지셨다.
“넌 어쩜 그리 니 애비랑 똑같냐”
“니 아빠”도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돌아오면, 뭐가 좋은지 흐뭇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십여년 전, 땡볕에서 밭일을 하다 아빠가 내게 들려준 말 한마디를 기억해냈다.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내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술을 좋아하고, 둘 다 타고난 골격이 넓은 편이라는 점 말고는 아빠 닮았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별로 없어서다. 부모와 닮은 점으로 유대감을 형성하던 어린 시절에는 이 점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나 찾고 또 찾아도 아빠와 나는 닮은 점보단 다른 점이 더 많았다. 과묵한 분이셨으므로 꼬치꼬치 캐묻기도 어려웠다. 별 수 있나 뭐. 아주 오래 전, 조금은 김 빠진 혼잣말과 함께 나는 ‘아빠와 닮은 점 찾기’를 가슴 한 켠에 묻었다.
“아빠는 땀 흘리는 게 좋아서 귀농했어. 밭일하고 땀으로 등판이 젖은 채 집안에 들어서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지금 내가 살아있구나 싶어서. 서울에선 못 느꼈거든.”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삶의 궁극적 목적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에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또한 “순수하게 육체적인 경험”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살아 있다’는 감각에 대한 갈망은 잘나가던 대기업 과장이던 내 아버지를 생면부지의 시골로 이끌었다. IMF 구조조정도 견뎌낸 인재의 퇴사에 주변인들은 ‘그 사람 미쳤다’고 입을 모았으나 당신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샌님 기질 다분했던 당신의 아들은 땀 흘리며 미소 짓는 아버지를 보며 의아해 했다. 아들은 ‘나는 아빠랑은 안 닮았어’라며 서운해 했지만, 정말 중요한 유산은 이미 아들의 가슴 한 켠에 뿌리를 박았다. 살아있고자 도시를 등진 당신의 DNA와 신념은 당신의 아들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땀을 빼야 숙면에 드는 남자로 길러냈다. 지금도 두 남자는 땀에 절은 옷이 수북한 빨래통을 보며 흐뭇해 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땀의 연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