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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Dec 30. 2019

고흐, 영원의 문에서

 글, 영화, 음악, 그림, 조각... 이 세계엔 셀 수 없이 많은 예술 분야가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예술가들이 존재합니다. ‘예술’, 혹은 ‘예술가’라는 헐거운 단어로 전부 규정해도 될까 싶을만큼 다채롭죠. 서로 전혀 다른 작업을 해나가는 이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하나의 이상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새로움에 대한 추구 혹은 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세계적인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예를 들어볼까요. 그는 거대한 사각형 캔버스를 몇 가지 색 페인트로 가득 채우는 특유의 스타일로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친 바 있습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의 작품 앞에서 일부 관객이 오열하며 무너져 내렸다는 전시장 전설(?)이 그의 전시회 마케팅에 활용되면서 그 인기는 더욱 확고해 졌죠. 그러나 로스코가 처음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것은 아닙니다. 되려 그의 초기작들은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유화 그림들에 더 가깝습니다. 선이 있고, 형태가 있고, 그림의 대상이 사람인지, 사물인지 명확히 알아볼 수 있죠. 그는 그림이 명확한 형태를 갖춰야 한다는 유구한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사물의 형태를 찢고 비틀고 쪼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다진 피카소처럼 말이죠.     


 헌데 여기서 주지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새로움’이 언제나 환영받거나 찬사를 받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로스코와 피카소의 예는 사실 꽤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예술의 역사를 고려해 봤을 때, 새로운 스타일이 받아온 대우는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더구나, 예술가들의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관객들의 외면 외에도- 또 다른 위험성 하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형식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작품의 대상이 주는 여러 가지 함의가 아웃포커싱된 사진의 배경처럼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제겐 이번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가 그랬습니다. 저는 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죽은지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다른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고흐와 그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출간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고, 얼마전에는 그의 일생을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다룬 영화 <러빙 빈센트>가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바꿔 생각해보면, 고흐라는 소재는 너무 많이 다뤄진, 흔한 소재라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더구나 고흐의 굴곡진 인생사는 예술사상 그 어떤 화가보다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귀를 자르고, 알콜 중독자처럼 압생트를 퍼마시고, 그와중에 한번 붓을 잡으면 미술사를 뒤흔들 명작을 그려젖혀 전설이 된 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단 한점의 그림만 팔린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간. 평생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갖지 못한 남자. 제가 고흐의 일생을 다루기로 마음먹은 영화감독이라면, 저를 괴롭히는 고민은 딱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할까?’겠죠.   


   

 그래서인지 줄리안 슈나벨 감독은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핸드헬드(handheld)’ 기법으로 촬영하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즉, 사람의 시선처럼 화면이 흔들리는 앵글을 영화 대부분에 적용한거죠. 때문에 <고흐, 영원의 문에서>의 화면은 불안정한 지면처럼 늘상 흔들립니다. 마치 한시도 적요할 날 없던 고흐의 불안한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죠. 또한 ‘일렁인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이 불안한 앵글은 자연 풍경을 특유의 ‘일렁이는’ 필치로 담아냈던 고흐의 작품 자체와도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강수는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가장 먼저, ‘멀미’입니다. 저는 제 동생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는데, 둘 다 영화가 끝난 후 한동안 배를 탄 듯 메슥거림에 시달렸습니다. 원래 멀미에 취약한 동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태어나서 멀미란 걸 느껴본 적이 없던 저조차도 특정 장면에선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영화의 앵글은 심히 흔들렸습니다. 더러는 고흐가 집안에서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화면은 옆으로 뉘인 듯 90도로 꺾이기까지 합니다. 이 장면이 한동안 이어지자 저는 ‘나도 고개를 옆으로 꺾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죠. 이 같은 관객의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영화의 앵글이 주제에 기여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리는 앵글은 영화의 가장 강력한 강점을 퇴색시켰습니다. 바로, 고흐의 대표작들이 연이어 탄생했던 프랑스 아를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풍경이 그것입니다. 고흐를 다룬 다큐멘터리 2편과 영화 2편, 드라마 에피소드 한 편까지 본 저지만, <고흐, 영원의 문에서>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영화는 본 적이 없습니다. 고흐가 살아생전에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의 찬란함을 수도 없이 예찬했다는 점을 감독은 잊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나 과한 핸드헬드 앵글은 고흐가 그토록 예찬하고 매료됐던 그 풍경을 좀 더 정확히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서사의 불친절함 역시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고흐의 오랜 팬인 저는 왜 그의 부모가 아닌 동생 테오가 형의 뒷바라지를 도맡았는지, 함께 작업하던 화가 폴 고갱이 그를 떠난다고 했을 때 왜 그가 귀를 자르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짙은 외로움의 한가운데로 몰아붙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고흐, 영원의 문에서> 예고편 中

 하지만 고흐를 잘 모르는 제 동생은 영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애를 먹는 듯 보였습니다. 고흐는 엄격한 목사였던 아버지와 평생 불화를 겪었고, 어딜가든 그에게 따라 붙었던 사람들의 무례와 멸시, 경멸은 그를 불행과 외로움의 늪으로 떠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설명하자 동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고흐라는 인간은, 영화에서 다뤄진 중년 시기 뿐 아니라 평생동안 몰이해와 비공감의 세계에서 홀로 분투해 왔던 것이죠. 물론 이해에 친절한 작품만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흐라는 독특한 개인을 있게 한 청년 시절의 방황을 생략한 감독의 선택이 관객을 향한 감정적 설득에 유효했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장점과 단점이 빛과 그림자처럼 명료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고흐를 연기한 배우 윌렘 대포는 여러 의미로 종잡을 수 없었던 고흐라는 한 존재에 무서우리만치 가까이 다가섰고, 영화에 담긴 프랑스 아를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풍광은 고흐를 소재로 한 그 어떤 영상물보다 뛰어납니다. 고흐의 자화상을 더 좋아하는 저까지도 그의 풍경화를 다시 검색해보게 만들 정도니까요. 고흐가 앓던 정신질환이 그를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혔는지에 대해 주목한 점도 고흐를 다룬 여타 작품과의 차별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의 산물이라 사료되는, 여러 실험적인 기법들은 진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저는 영화에서 핸드헬드 앵글, 갑자기 노란색 선글라스를 씌운 듯한 색채 화면 등의 기법은 정말 강조해야 할 부분 몇몇곳에 아껴 사용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마치 도치법처럼요. 문장의 어순을 바꾼 도치법은 물론 멋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전부 도치법으로 쓰인 장편 소설은 아무래도 제대로 읽혀지기 어렵겠죠.     


 이러쿵 저러쿵 길게 떠들긴 했지만, 만듦새에 공을 들인 영화라는 점은 틀림이 없습니다. 담아내고픈 감정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원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애당초 그렇게 떠들지도 않죠. 말이 많은 사람 모두가 매력적이라고 볼 순 없지만, 그들의 수다스러움은 최소한 해당 주제에 관한 그들의 열정을 증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흐가 대화 화제에 오르면 언제나 수다스러워졌던 저였기에, 저는 줄리언 슈나벨 감독의 기법적 수다스러움을 다소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열정 넘치는 감독과 제작진, 배우진들의 다음 수다거리를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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