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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ug 04. 2019

영화 <나비효과>: 괜찮아, 그런대로

픽사베이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면 사람은 한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릭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개념을 소개하며 든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들이 가게의 창문을 깨자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야단친다. 이를 본 지인들은 “유리 가게 사장도 먹고 살아야 되는데 유리가 깨지지 않았으면 그는 어떻게 먹고 살겠나”라며 사장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학자답게 명료하고 간단한 일화다.     


 위의 일화에 조금의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보자. 이 아들이 유리창을 깨기 훨씬 전부터 부모 속을 찢어놓던 문제아였고, 유리창도 한순간 반항심에 깬 거였다고 말이다. 박살난 유리창 앞에서 아버지의 화가 기어이 폭발하고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의 가슴에 잔인한 말을 내리꽂은 채 연을 끊기로 한다. 10여년 후, 후회 많은 삶을 산 아들은 유리창이 깨졌던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저릿한 후회에 젖는다.   

  

‘그날 그 유리창만 깨지 않았더라면....’     

 영화 <나비효과>는 그날의 깨진 유리창을 이어붙이기 위한 남자의 분투와, 그 분투 끝에서 그가 마주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다.      


* 나비효과 :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의 강연 제목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아주 작은 변수만으로도 후일 완전히 다른 결과값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통용됨. 



   

영화 <나비효과> 스틸컷

 7살 에반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갇혔고, 홀어머니와 다름없던 엄마는 매 출근 전 동네 친구의 집에 자신을 맡겼다. 하필 에반을 맡은 친구의 아버지는 소아성애자였고 자신의 어린 딸(케일리)과 에반의 성행위 장면을 영화라며 카메라에 담곤 했다. 케일의 오빠이자 에반의 친구였던 토미는 에반의 강아지를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짧지만 너무 길었던 에반의 생에서,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케일의 자살은 옅어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이런 에반이었기에 그는 일기장을 통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주저없이 카메라 앞에서 벌겨벗겨 졌던 그날로 돌아간다. 케일 아버지의 성추행을 단념시킨 에반은 안도한다. 유리창은 깨지지 않았고,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영화 <나비효과> 스틸컷


 운명의 나비가 날개짓을 시작한 건 그때부터 였다. 현실로 돌아온 에반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때론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케일리가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기도, 그의 엄마가 폐암에 걸려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한다. 그때마다 에반은 과거로 가 또 다른 유리창을 이어 붙이지만 점차 거세지는 나비의 날개짓은 에반과 지인들을 더욱 먼곳으로 몰아세운다. 과거의 실수를 수정할수록 상처가 깊어지는 아이러니를 응시하며 에반은 마지막 여정에 나선다. 자신과 케일이 처음 만난 시간으로 돌아가 케일에게 욕설을 해 자신과 멀어지게 한 것이다. 이제 자신과는 어떤 교집합도 가질 수 없게 된 첫사랑을 떠올리며 에반은 시간여행 장치인 일기장을 불태운다.      


영화 <나비효과> 스틸컷


 경제학에서 인간의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이 기회비용을 -다소 억지스럽게라도- 계산해 낸다. “당신은 ‘1시간’이라는 자원을 운동을 하는 대신 침대에 누워 폰게임을 하는 것에 소비했으므로 당신이 지불한 기회비용(운동)은 0,000원에 달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명료하고 간단한 행동 준칙이 도출된다. 언제나 효용이 큰 것만을 택할 것. 맞다. 그토록 간단하다.      


영화 <나비효과> 스틸컷


 경제의 기회비용과 인생의 기회비용 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값으로 지불하는 기회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다는 점이다. 유리창이 깨짐으로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는 단절됐지만, 덕분에 유리 장사꾼은 귀한 매상을 올렸고, 그 매상은 다시 그의 가족들에게 따듯한 한끼로 분했을지 모를 일이다. 간만에 풍족한 저녁 밥상을 사이에 두고 유리 장사꾼의 가족들은 금 가고 있던 서로의 결속을 재확인 했을 수도 있다. 에반이 단 하나의 실수를 바로 잡을 때마다 자신의 주변의 삶이 파국으로 치달았던 사유도 여기에 있다. 인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진해 간다는 것. 인생이 공평하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완벽히 무작위하는 점에서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나비의 날개짓 아래 사는 우리네 인간들의 숙명이다. 


영화 <나비효과> 캡처

 

 영화의 마지막, 에반이 일기장을 태우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단 하나뿐이던 사랑을 에반은 접점이라곤 하나 없는 다른 인생을 향해 밀어냈다. 아버지는 여전히 정신병동 수감자 일 것이며 집안의 가장인 어머니는 바싹 타들어가는 가계에 간신히 물을 대며 살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미련없이 일기장을 태울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최선의 선택들로 채워져 있음을 깨달아서 였다. 결과가 늘 좋았다는 뜻으로서의 최선이 아니다. 그저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일말의 확신이다. 많은 걸 잃어버린 지금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나쁘지만은 않은 인생이었다는 최초의 긍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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