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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May 11. 2019

<스틸 앨리스> :  당신에겐 '인생 단어'가 있나요?

“자기가 자기 자신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의도였던 걸까. 살벌한 몰골로 졸고 있는 우리 철학과 학생들에게 K 교수가 던진 질문은 우리 눈가에 생기를 돌려놨다. 강의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던 우리였으므로 곧 온갖 기상천외한 답들이 쏟아졌다. 외모, 지인 구성의 일치, 유전자 배열 등 재기 넘치는 답변이 남발됐으나 문·이과를 넘나드는 지식을 방패 삼은 K 교수의 반격에는 여유가 있었다.  이윽고 학생들의 전의가 꺾인 것을 확인한 그는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답은 ‘기억’입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오며 축적된 그 기억이야말로 ‘나는 나다’라는 확신을 가능케 합니다. 어떤 경험을 거쳐왔는지, 그때의 감정은 어땠는지 같은 기억을 갖고 있는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확신할 수 있겠죠. 기억을 잃는다는 게 무서운 건 그래서입니다.”     


깔끔한 논증. 철학과 학생들은 침묵으로서 패배를 인정했고, 교수는 조용히 수업을 재개했다.     



영화 <스틸 앨리스> 스틸컷

 삶은 초콜릿 박스와 같다고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는 말했다. 존경받는 언어학자이자 세 남매의 엄마 앨리스 역시 삶으로부터 99번째 초콜릿을 선물 받았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삶에 감사했다. 100번째로 건네받은 초콜릿 박스에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독사과가 들어있음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던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인간 정신의 한계는 그가 소유한 어휘의 한계와 같다. ‘슬프다’는 어휘만을 지닌 자와 ‘씁쓸하다’ ‘서글프다’ ‘우울하다’ 등의 어휘를 고루 아는 자 간의 사고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를 한계 짓는다.


 앨리스가 평생 언어학에 매진해온 언어학자라는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언어학은 본질적으로 ‘소통(communication)’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조건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 진단 후 앨리스는 첫 말을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단어 공부를 시작하지만 단어는 그녀의 혀끝에만 맴돌 뿐 뱉어지지 않는다. 소통 전문가가 소통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역설. 자신을 아끼고 걱정하는 대가족 한가운데에서 앨리스의 고립감은 덩치를 키워간다.    


영화 <스틸 앨리스> 스틸컷
 “내 일부가 사라져 가는 느낌이라고!”
<스틸 앨리스>, 앨리스의 대사 中


 ‘나는 지금 슬퍼’라고 발음할 때, ‘지금’과 ‘슬프다’ 어휘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주어 자리에 위치한 ‘나’라는 개념 자체다. 모든 소통은 ‘나’라는 반석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어떻게 느끼는지,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설령 어휘를 안다고 해도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지 않은 소통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맞다. 앨리스는 전존재를 상실해 가는 중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패배가 예정된 삶과의 투쟁을 앨리스는 계속한다. 이 투쟁에는 큰딸의 이름이나 집 주소를 매일같이 암기하는 것부터 “그때가 오면” 미리 준비해둔 수면제를 털어넣고 긴 안식에 드는 것까지 포함된다. 앨리스로 살다가 앨리스로서 죽기. 다른 사람에겐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가 앨리스에겐 악바리 같은 노력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목표가 된다.      


영화 <스틸 앨리스> 스틸컷
“제가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단지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경과가 그렇듯, 앨리스의 기억은 최근부터 역순으로 사라진다. 앨리스는 점심 메뉴가 뭐였는지부터 시작해 막내딸의 이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이름과 생일까지 잊는다. 영화의 마지막, 거의 모든 것을 알츠하이머에게 내준 앨리스는 막내딸이 읽어준 단편 소설을 듣는다. 꼭 그녀의 인생을 닮아 있는 소설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를 묻는 딸의 질문에 앨리스는 마지막까지 잊지 않은 단어 하나를 힘겹게 발음한다.


“엄마, 이게 뭐에 대한 얘기 같아?”
“..........사랑(Love)”     



 기억이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라 설파했던 그때 K 교수의 주장을, <스틸 앨리스>는 뒷받침하고 있는 듯 보인다. 병세가 극에 달해 모든 단어를 잊은 앨리스의 모습은 자신감 넘치던 언어학 교수 앨리스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앨리스는 이제 예전의 앨리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가 딸에게 뱉은 단어가 ‘새’나 ‘물’이 아닌 하필 “사랑”이라는 마지막 설정을 통해 <스틸 앨리스> 제작진은 K 교수의 물샐 틈 없는 논증에 작은 반론을 시도하고 있다. 삶이 건넨 독사과를 먹고 많은 걸 상실해 가면서도 “사랑”을 잊지 않은,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한 사랑했던 존재로서의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라고. 


 죽음처럼 확실한 망각이 시시각각 우리 목을 조여온다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잊지 않을 단어는 무엇일까. 혹은 그때까지 잊고 싶지 않은 한 인생의 단어가 있다면, 나는 그 단어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스틸 앨리스>가 남기는 질문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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