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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Nov 08. 2020

뼈 때리는데 자부심을 가진 자들에게 고함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첨예했던 대립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꼰대’‘요즘것들’ 간의 신경전이었다. 오죽하면 3대 성현 중 하나라던 테스형조차 젊은이들의 고발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시절보다 더 오랜 옛날, 고대 벽화 한 구석에는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푸념이 새겨져 있다는 소문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두 세력간의 간의 대립이 주로 ‘조언(助言)’이라는 대화 형식에서 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어디 꼰대와 요즘것들 만의 문제인가. 친구, 연인, 가족 간에서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강변하는 A들과, 반쯤 썩은 미소를 띤 채 속으론 두고 보라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B들을 우리는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를 대학 토론 배틀 버전으로 변주해 본다면 이정도가 되겠다. "뼈 때리는 조언, 항상 유익한가?"


조언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문제적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도움말이다. 한마디로 선의에 기반을 행위라는 것이다. 상대의 충고가 내 상황을 타개해 가는데 일말의 통찰을 준다면 경청하고, 아니면 한 귀로 흘리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꽤 특수한 상황이나 상대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조언에 대해 흐릿하게나마 반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럼 조금 지난 SNS 유행어처럼 남 조언 따위는 무시한 채 평생 ‘개썅마이웨이’로 살아가고, 또 타인의 개썅마이웨이에 대해서도 그 어떤 논평이나 충고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우리가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에 불과한 이상 그 방안도 별 현실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내 나름의 답을 찾은 건 전혀 의외의 한 정치학 서적에서 였다.




“(현명한 군주는) 국가에서 현명한 사람들을 선별하여 그들에게 진실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군주가 요청할 경우에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절대 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中



마키아벨리는 제아무리 현명한 군주라 할지라도 그에 못지 않은 혜안을 갖춘 인재들이 존재함과, 군주가 통치에 있어 그들의 조언을 경청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마키아벨리 본인부터 당시 통치자였던 로렌초 메디치에게 정치에 관한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여달라 사정하며 쓴 책이 바로 『군주론』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타인의 조언을 듣는데 두 가지 엄격한 제한 사항을 뒀다. 바로 군주 자신이 인정한 사람들만이 조언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도 군주가 원할때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렌초 메디치는 자신에게 헌정된 『군주론』을 들춰보지조차 않음으로써 마키아벨리의 충언을 몸소 실천해 냈다.


군주 본인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국가 스포츠마냥 조언을 하기 시작하면 군주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땅에 추락하게 된다. 인간은 프레임을 통해 사고하는 동물이다. ‘조언이 필요한 자’ 대 ‘조언을 하는 자’의 프레임이 보편적으로 통하는 순간부터 군주는 타인의 조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줏대없는 지도자로 뇌리에 각인될 가능성이 크다. 조언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리더를 존중하고 따르기란 그야말로 쉽지 않다.


군주가 원치 않을 때조차 직언(요새말론 ‘뼈 때리는 팩폭(팩트폭격’)을 남발하는 자를 옆에 두는 것 역시 비슷한 결과는 낳는다. 군주가 나름의 의지를 발동해 시행하는 과업을 두고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사건건 팩폭, 혹은 팩폭을 가장한 대안없는 비난을 해대는 자를 가까이 둔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제 3자들이 본다면 군주의 대외적 권위는 크게 손상될 것이다. 군주 본인이 매번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덤이다.


물론 현대 민주정의 정치가들이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또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극히 다원화 돼가는 사회를 조율하고 통합해야 할 의무를 진 현대의 지도자들은 좀 너무하다 싶을만큼 시민 개개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다못해 그런 척이라도 하는 편이 통치에 있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되려 개인의 삶에 있어 본인의 주체성과 타인의 조언의 비율을 어떻게 조화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마키아벨리의 시각은 색다른 통찰력을 제공한다. 반드시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조언은 내게 유익한 말을 해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에게서만 구하고,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경청한다. 반대로 조언은, 상대가 내게 진심으로 구해올 때만 기쁘되 무거운 마음으로 해주도록 노력한다. 상대가 나의 혜안을 높이 사고, 또 조언을 필요로 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는 뜻이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조언’을 둘러싼 우리네 삶의 숱한 분란과 상처, 신경전도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P.S : 당연하겠지만 내 조언조차 절대적이지는 않다. 기대치 않은 조언과 통찰로 견고하던 선입견이 깨지는 통쾌한 경험은 도처에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별 생각없이 읽었던『군주론』에서 뜬금없이 인간 관계에 관한 통찰을 얻었듯이 말이다. 늘 그렇듯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다들 아무쪼록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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