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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문학을 위한 변론

by 시언

벌써 10년전 일이군요. 학계 석학이자 정부 요직까지 두루 거치신 원로 교수님 한분과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어려운 분과의 어려운 자리. 그러나 당시의 저는 꽤 신이 나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은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고, 그럼 당연히 책을 많이 보셨을테고, 내가 재밌게 읽은 책에 대해 말해도 흥미롭게 들으시겠구나! 책 얘기할 기회만 찾아다니는 인간만이 떠올릴법한, 기적의 삼단논법이었습니다.


레어였던 철판 스테이크가 웰던이 되도록 저는 당시 읽던 국내외 작가들에 대한 나름의 감상평을 떠들어댔습니다. 솔제니친, 김훈, 소포클레스, 김수영... 다행히 교수님은 지루한 기색은 아니셨어요. 하긴, 본인 눈짓 한번에도 잔뜩 얼어붙었을 대학원생들만 대하시다가 학생증에 잉크도 안 마른 복학생 녀석이 책이 어쩌고 떠들어대니 신기한 광경이셨을 겁니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교수님께선 상상도 못한 제안을 건네셨습니다.


“그럼 자네가 나한테 책을 좀 추천해 주게. 메일로 추천 도서 목록을 보내주면 좋겠어”

돌이켜보면 우리 학교 교수님도 아니셨던 분. 그날 이후 저는 일주일여간 안 가던 도서관까지 드나들며 정성스레 목록을 채워갔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십수권을 적었다가, 바쁘신 분을 귀찮게 할세라 다시 두어권만 남기는 시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됐죠. 비문학은 거의 읽지 않던 때였으므로 저의 리스트는 저의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프란츠 카프카)를 깬 소설과 시집, 에세이 대여섯권으로 짜여졌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발송일.



답장은 생각보다 금방 왔습니다.


“나는 교양으로 책을 읽기보단 나라의 앞날과 정책을 고민하기 위해 읽네....(중략)...최근의 내 독서목록을 보내니 열심히 하게나”


교수님이 첨부하신 도서 목록에는 과연 국가의 앞날을 염려하는 이가 읽을 법한 거대 담론 도서 백여권이 빼곡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같은 대중 서적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어디까지나 트렌드 파악 정도의 목적성이 분명해 보였고, 소설이나 시집은 한권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풋내기 문학 청년의 추천 목록을 보며 교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난 그것도 모르고... 연원을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양 볼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지금껏 생생합니다.


'국가의 앞날을 모색한다' 지극히 명료하고도 건설적인 당신의 목적 앞에서 문학이 설 자리란 협소하고 또 궁색해 보였습니다. 무릇 진취적인 자의 독서란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라는 어른께선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를 바 없다면 독서의 이유가 없다 하셨다던데. 이에 본 변호인은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나는 왜 읽는가. 그것도 문학을. 그 완벽한 쓸모없음을.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한 통계 논문을 발췌하여 게재했다. 그 결론은 두 개의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5백 권 이상의 장서를 가지고 있는 집의 자녀들은 10여 권의 책밖에 없는 집의 자녀들보다 지능 지수가 더 높고 사회생활의 적응도 빨라서 자라면 더 좋은 직장을 가진다. 둘째, 책도 책 나름이다. 셰익스피어나 기타 고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특히 자녀의 성공률이 높다. 시집이 5백 권의 장서 중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으면 그 자녀의 성공률은 교양서적을 가지지 못한 집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못하다. 그런 집의 자녀는 방랑자나 몽상가가 되기 쉽고 현실 적응력과 경쟁력이 떨어져 사회생활에 부적합하게 되기 쉽다. 이 기사의 제목은 '시를 읽지 마라' 였다.’
- 마종기,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서문 中


‘실용’이라는 서슬퍼런 칼춤 앞에서 문학은 백전백패하며 스러져 갑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소설 몇 권 읽는다고 인간관계에 도가 트는것도 아니고, 얄팍한 시집 한권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들기 전 센치해져버린 두어 시간 정도일 텐데. 실용의 시각에서 볼 때, 문학을 너무 많이 읽어 '방랑자나 몽상가가 된' 이들은 유폐된 단종처럼 가시나무 담장이 둘러쳐진 집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사위여가는, 한심한 룸펜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죠. 영화 <위대한 개츠비> 속 대사처럼, 새로운 그 어떤 것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인간들이랄까요?


그럼에도 왜 문학을 읽느냐고 누군가 재차 묻거든, 본 변호인은 독자인 우리가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자 합니다. 다들 태연하게 통과하는 생의 터널 가운데서 길을 잃고, 자격지심으로 불어터진 살갗 위에 무수한 생채기를 입으며, 아무도 날 모르는 무인도로 도망가고 싶어하면서도, 그럼에도 이런 한심한 인간이 나 혼자만은 아닐거라 확인받고 싶어하는 우리야말로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요. 고대로부터 소설가들이 패배한 자, 비탄에 빠진 자, 한 번의 나쁜 선택으로 파멸해가는 자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도 이때문일 것입니다. 처절하게 몰락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이 어떻게든 이어지는 모습에서 독자들은'내 삶도 그렇겠구나'하는 시답잖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변론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문학 따위 딱히 읽을 필요 없을만큼 안온한 하루가 여러분에게 허락되기를.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비감한 여러분의 곁엔 언제나 문학이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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