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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Dec 05. 2023

만년필을 팔지 못한 이유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애장품을 하나씩 가져와 주세요”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애장품을 하나씩 가져와 주세요”


한 연말 모임 주최자의 요구였다. 뭐든 고르면 되리라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방안을 살폈다. 키보드와 책 몇권, 각종 영양제들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매일 먹고 사용하는 물건들이긴 하지만, 내겐 애장품보단 호미나 몽키스패너 같은 공구에 더 가까운 물건들이다. 밥벌이와, 밥벌이를 감당할 몸을 유지하기 위한 공구들을 애장품이랍시고 가져가고 싶진 않았다.


이번엔 침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내 자전거와 아령, 책들 따위의 공구들이 있었다. 이쯤되니 막막함보단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나의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이 사실은 공구 창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밥벌이가 아무리 엄혹하대도 이 정도였을 줄이야.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라던 일본 여류 시인의 일갈이 환청처럼 들렸다. 시집이라도 남아 있다면 챙겼을텐데. 시의 서정이 버거워진지 오래인 30대 남자의 책장에서 시집 또한 멸종한지 오래였다.


요새 읽는 책이나 챙기려 어지러운 침대 맡을 뒤지는데, 짤막한 펜 한 자루가 손등 위로 굴러 올라왔다. 내 검지 손가락보다 살짝 긴 카웨코社의 만년필 ‘스포츠 오리지널’이었다. 좀 더 뒤져보니 다섯 자루쯤 되는 만년필들이 침대 프레임 밑 먼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들고 다니던 필통에도 네 자루쯤 되는 만년필들이 잠자고 있었다. 파카, 세일러, 플래티넘, 홍디안, 파이로트, 펠리칸, 워터맨 등 펜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대체 나는 별로 쓰지도 않는 이 펜들을 왜 지금껏 처분하지 않은걸까.


돌이켜보면 내 만년필 수집엔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일단 난 손글씨 쓰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스스로 봐도 그리 훌륭한 필체가 아닐뿐더러,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잡념들을 온전히 받아적기엔 손도 너무 느렸다. 그럼에도 나는 만년필을 사고, 모았다. 장기간의 취업난으로 생활고를 겪을 때조차 팔지 않았다. 만년필을 처분하고 몇 달간은 라면을 좀 덜 먹어도 됐음에도 그랬다. 먼지 쌓인 만년필들과의 이 고집스런 동행에 대해 숙고하며 나는 연말 모임 장소로 향했다.


“제가 가져온 애장품은 만년필입니다. 그렇다고 매일 좋은 글을 필사하는 고상한 취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사실 취업하기 전 전업 작가를 꿈꾼 적이 있습니다. 좋은 펜을 가지면 더 좋은 글이 써질까 하는 미신에 현혹돼, 없는 형편에 첫 만년필을 샀었어요. 하지만 역시 미신은 미신에 불과했고, 전 결국 작가로서의 펜을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업 전선으로 떠날 때의 서러운 마음을 이렇게 자위했던 기억이 나네요. ‘만년필을 버리지 않는 한, 난 작가를 포기한 게 아니야.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뜻이야’라고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만년필은 실용의 세계로부터 진작에 배제당한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걸. 볼펜과 달리 특정 각도로만 써야하고, 아무리 조심해도 잉크가 손가락에 덕지덕지 묻고, 다만 며칠이라도 쓰지 않으면 잉크가 펜 안에 말라붙는다. 입문용 만년필 대다수가 얼마 못가 책상 한 구석에 처박히는 이유다. 만년필의 시대는 저만치 지나갔다.


아주 가끔씩 만년필을 쓸 때면, 만년필의 운명이 문학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 얼른 돈 벌어 부자되라는 각종 재테크 관련 책과 영상들에 떠밀린 문학의 설 자리란 그야말로 협소하고 또 궁색한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진작 문학의 길을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 또한 재테크 용어론 적시에 ‘엑싯(Exit)’한 부류 중 하나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애장품은 만년필이다. 매일 좋은 글을 필사하는 고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펜에 쌓인 먼지를 닦고 말라붙은 잉크를 녹이며 앞서 떠나온 어떤 세계로의 복귀를 그리는 미련 많은 사람이어서다. 만년필을 버리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있다고, 쉽게 현혹되는 바보 같은 사람이어서다.


내 애장품은 만년필이다.


출처 :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 연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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