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 아이가 부모도 있고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는데, 그 가지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 마을 사람들이 구해주자 그 아이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잡아끌며 저세상의 즐거움에 대해 극진하게 말해 주었어요. 그의 말에 따라한 것인데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 『어우야담』, 유몽인 作
아이는 옛집 대청마루에 반듯이 눕는다. 천정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대들보가 보인다. 아비인 봉룡이 새 기와집을 지을 적에 수령(樹齡) 200년을 넘겼다는 마을 야산 어귀 소나무를 베어다 얹은 대들보다. 아이는 대들보서 묶여 내려온 밧줄의 끝 고리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잠자코 지켜본다. 아이의 덜 여문 머리통이 알맞게 들어갈 작은 고리다.
들보로 얹을 나무를 베던 날, 구경 온 동네 노인들은 경을 칠 일이라 혀를 찼다. 그러나 이내 서슬 퍼런 봉룡의 눈길 한 번에 얼른 딴청을 피우고 마는 것이었다. 어렸던 성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힐끗대는 노인들의 눈길에 깔려 있던 은근한 질투를 기억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봉룡과 숙정이 사라진 집을 ‘도깨비집’이라 부르며 흉물스러워 했다. 다만 여느 집보다 크고 우람한 저 대들보만은 몹시도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현해탄을 건너 통영으로 온 일본인 무역상도 풍문을 듣고 찾아와 ‘스고이 스고이’ 외치며 눈독을 들였다. 일본엔 조선산 고목을 비싸게 사들이는 수집가들이 많다는 전언이었다.
송씨 또한 부정 탄 집의 들보를 얼른 팔아치우고픈 눈치였다. 성수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찬물 한 그릇조차 아까워하던 송씨였다.
반면 봉제 영감의 뜻은 완강했는데, 도깨비집의 처분은 오롯이 봉룡의 아들인 성수에게 그 결정권이 있다는 것이다. 기 센 송씨가 어린 성수에게 의견을 구하는 모양새를 만듦으로서, 장차 약국을 이어받을 성수로 하여금 집안 내 입지를 굳히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남편의 완강함에 송씨는 일단 꼬리를 내린 채 성수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성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타부타 말이 없는 아이다.
결심한 듯 성수가 밧줄 아래서 일어나던 찰나, 왠 여자아이의 새된 목소리가 들린다. 성수를 찾아 도깨비집까지 온 연순이다. 성수는 목소리가 난 쪽을 잠시 돌아보더니 밧줄의 매듭을 쥐고 힘주어 집어 던진다. 원심력을 받은 매듭은 대들보에 구렁이처럼 칭칭 감기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키가 작고 주위가 산만한 연순으로선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높이다.
“성수야”
“누부는 예까지 모하러 오요?”
“나야 니 찾아왔지. 니야말로 허구헌 날 예서 모하노. 부정타구로”
“....타관에 갈라꼬요”
“뭐?”
“예 말고, 저짝 타관으로 가볼까 하고요”
과거 숙정은 남편 봉룡에게 얻어맞은 날 저녁이면 아들 성수를 불러다 머리칼 속 이를 잡았다. 어느새 숙정은 이를 잡는다는 명목은 어디로 가고 참빚으로 아들의 머리칼을 한참 빚곤 했다. 성수는 그때마다 어깨 너머로 들리던 모친의 혼잣말을 기억한다. ‘타관엘 가고 싶구나’. 성수는 비상을 먹고 죽은 숙정의 시신을 본 날 깨달았다. 모친이 말한 타관이 어디였는가를.
이러한 사정을 알리 없는 연순은 성수가 한 말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한 채 갸웃거린다. 다만 짐짓 예감한 바가 있었는지 연순은 성수의 손을 꼭 붙들고 당부한다.
“타관에 가지 마라. 내랑 예서 살자. 신병에 몸 배린 내랑, 맴 다친 니랑, 우덜끼리 서로 그리 살자”
"참내, 내는 몰라도 누부가 뭘 배리요? 곧 시집 갈 양반이, 말 좀 이쁘게 하소"
"퍼뜩 알겠다캐라 쫌!"
성수는 흥분해 붉어진 연순의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뿌리치려 하지만 연순의 조막만한 손에서 나오는 아귀 힘은 생각보다 억세다.
“알았으니 놔요”
“니 참말이제?”
“아 알았으니 놔요. 누부 또 신열 오르것네”
“알았으면 인자 밥무러 가자. 우리 예 온거 알면 어매가 또 경을 칠끼다”
연순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실거리며 성수의 손을 잡아끈다. 끌려나가던 성수는 연순 몰래 뒤쪽 대들보를 올려다 본다. 타관으로 가는 건 다음, 연순이 출가한 이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