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캉디드>;긍정의 힘?부정의힘!

by 시언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성격 중 가장 기묘한 것은 일어나지도 않은 온갖 걱정거리들을 끌어다 고뇌하는 소심함과,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에 관해선 대책 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낙관주의공존한다는 점이다.
얼핏 보아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양극단의 두 특성이 내 안에서 공존한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나란 인간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가.’하고 당혹감에 빠지곤 한다.

아마 ‘소심함’은 본래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격일테고, ‘낙관주의’는 그런 천성의 반대급부로 생겨난 후천적 성격일 것이다. 오늘 다룰 볼테르의 책, <캉디드>는 바로 이 ‘낙관주의’에 관한 한없는 조소와 경고가 담긴 작품이다.

1700년대 독일, 베스트팔렌이라는 촌락에 위치한 한 남작의 성에 ‘캉디드’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순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성주인 남작의 총애를 받으며 낙관주의 철학자 ‘팡글로스’에게 인생에 관해 배운다.


캉디드가 팡글로스에게 사사받은 사상은 당연히 ‘낙관주의’, 즉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세상에 악은 존재하지만 그건 우매한 몇몇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실수일 뿐, 세계는 언제나 최선의 상태로서 기능한다는 게 팡글로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가는 생은 없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캉디드의 인생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소설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쭉.

남작의 딸에게 당시 의례대로 손등에 키스 한번 했다는 이유로 지상낙원이라 믿었던 성에서 쫓겨나는 것을 시작으로, 투옥, 강제입대와 탈출, 사기까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캉디드의 고생담으로 이 소설은 점철되어 있다. 책을 읽다보면, 책 안의 신적 존재가 캉디드에게 고난을 내리며 ‘이래도 낙관이야? 이래도?! 이래도?!!’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온실 속에서 글과 풍문으로만 접하던 ‘악’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때마다 흔들리는 캉디드의 낙관주의다. 하나의 악을 겪어낸 후, 애써 낙관적으로 방금 당한 일을 갈무리하기 무섭게 들이닥치는또 다른 고난 앞에서 캉디드의 낙관주의는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른다. 급기야는 낙관주의가 뭐냐는 친구의 질문에

“아! 그건 나쁜데도 불구하고 좋다고 마구잡이로 우기는 거야.”
- 본문,101p(e북 리더기로 읽은 전자책 버전이므로 종이책과는 페이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라 답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간 유지해오던 낙관주의의 관성에 의해 금세 원래 페이스를 찾긴 하지만, 한번 시작된 낙관주의에 대한 의구심은 그의 머릿속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온갖 시련을 모두 치러내고 결국 (추녀로 변해버린) 자신의 첫사랑과 정착에 성공한 캉디드. 그의 앞에는 이제 여느 3류 연애 소설과도 같은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류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하도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그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달랑 작은 농가 한 채 뿐이었다. 한 떨기 꽃과도 같던 첫사랑은 허구헌 날 불평불만에 바가지만 긁어대는 아줌마가 되었다.

'나날이 더 추해지는 그의 아내는 까다로운 밉상꾸러기가 되어 버렸다...(중략)... 인간은 어디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마르틴만은 인내심을 갖고 모든 것을 감내하였다.’
- 본문 181p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인간은 어디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캉디르의 동료, 마르틴이다. 끝없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희망을 놓치 못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인간사 자체에 회의적인 마르틴만은 고난의 순간들을 덤덤히 통과해 간다.

당연한 일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세상은 원래 이 모양 이 꼴이라 믿는 이에게 고난은 그야말로 ‘일상’에 불과하다. 처음엔 마르틴의 의견에 전혀 동조하지 못했던 캉디드도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낙관주의를 버리기 시작한다.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네. 만일 자네가 퀘네공드 양을 사랑한 죄로 성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또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또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지 않았더라면, 또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게 아닌가.”
- 본문 188p

자신만큼이나 지독한 고난을 당해왔음에도 끝내 낙관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옛 스승 팡글로스의 주장에 캉디르는 전처럼 어째서 그러하냐고 따지지도, 다시 희망적인 눈빛을 빛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덤덤하게 한숨과도 같은 한 마디를 읇조린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본문 188p

소설가 김영하가 산문집에서 인용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악의 유태인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해방의 순간까지 가장 많이 생존한 이들은 낙관주의적 믿음을 고수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낙관주의자들의 생존 확률은 꽤 낮은 축에 속했다.


가장 생존 확률이 높았던 이들은 놀랍게도 미래에 관해 지극히 비관적인 예측을 고수해 온 이들이었다고 한다. 더 정확히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예측을 토대로 하면서도 오늘 하루하루의 생존에 충실했던, ‘비관적 현실주의자’들의 생존확률이 가장 높았다. 어째서 일까.

일단 비관적 현실주의자들에겐 끝없는 희망과 현실의 부조화에서 오는 절망감과 비통함에 들어가는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다. 미래에 관해 비관적이니 실망할 일 역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현실주의적’ 면모다.

동료들이 깨어진 희망을 부여잡고 비통함에 젖어있을 때 그들은 말없이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 외모를 가다듬고(아우슈비츠에선 노역에 부릴 수 없는 병약자들 위주로 가스실로 보내 처형시켰다.) 돼지죽이나 다를 바 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한 마디로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지속했던 것이다.
해방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마치 이 <캉디드>의 마지막에 캉디드가 낙관주의를 버리고 밭을 가는 것을 택했듯이 말이다.

낙관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냥 살기에는 너무나도 팍팍한 세상사. 바라는 것을 조금 희망하는 게 뭐가 그리 나쁘겠는가.
오히려 낙관주의는 일상적 절망과 실패를 효율적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또 다른 희망을 품었을 때 인간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인생이 송두리째로 흔들리는 거대한 고난의 한 가운데 있을 때, 낙관주의는 되려 당신을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해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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