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천재 여류작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은 마약 복용 혐의로 서게 된 재판정에서 그 유명한 주장을 펼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극에 달한 사치와 낭비, 두 번의 이혼, 수면제 과복용에 마약과 도박 중독, 경제적 파산까지. 중년이 된 그녀는 에세이집에서 “사람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고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고흐의 풍경화와 자화상 중에서 어느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고객은 머뭇거리더니 자화상이 더 좋다고 말했다. 고흐의 자화상에 탐닉하는 자들을 나는 유심히 바라본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다.”
-본문, 11P(E북 리더기 페이지로, 종이책 버전과는 상이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주된 일상은 최소한의 사무집기만 구비된 사무실에서 홀로 ‘고객’들을 찾는 일이다. 그의 고객들은 ‘고독한 사람’들이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해온 소녀부터, 입대를 앞둔 동성애자까지, 한밤중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망가진 일상을 토로한다. 충분히 망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고객이 될 수 있다. 그의 직업은 ‘자살 안내자’다.
“봄이 되면 의뢰인이 많아진다. (중략)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본문, 76P
자살 안내인인 ‘나’를 비롯해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전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혹은 여행에서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래는 그의 고객으로 최종 낙점된 ‘유디트’라는 여자의 술회다.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 본문, 102P
맞다. 확실히 인생은 제멋대인 무언가다. 큰 꿈도 아니고, 그저 소박한 행복 몇 가지- 이틑테면 사랑하는 배우자와 크지 않는 내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같은. - 면 족했을 나였건만, 인생은 그 소박한 꿈마저도 거저 내주는 법이 없다.
나이가 들면 조금은 삶이란 게 명료하게 보일 줄로만 알았는데, 어찌된 모양인지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인생이란 놈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상을 소화해 나가다 문득 뒤돌아 봤을 때, 분명 어딘가 있을 생의 출발점은 이제 어디로 증발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의 아이러니는 “우울”이라는 중심 감정을 제외하고는 전체 플롯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딱히 없음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점이다. 아니, 잘 읽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 한쪽에 콱콱 박힌다. 헌데 이 우울이 뚝뚝 떨어지는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덩달아 우울해 지는 대신, ‘살아봐야지.’하는 어떤 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제목부터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의 이름이 바로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흔히 ‘정화(or 배출) 작용’이라고 번역되곤 하는 고대 그리스어 카타르시스는 문학 비평 용어임과 동시에 심리, 정신분석 용어이기도 하다. 너무나 지친 순간, 비극적인 영화를 보다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본 경험,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속앓이하던 고민을 털어놓고 조금은 후련해졌던 경험이 바로 대표적인 카타르시스의 사례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작품을 접하면서 모종의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우울과 비관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나의 비극을 대신 살아주는 존재들이다. 문장 안에서 그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우울을 겪어내며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메시지를 건넨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은 이러한 소설적 정의에 충실한 작품이다.
“안녕, 고마웠어요. 당신의 꽃들이 영원하길.”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 193P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자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던 걸까. 이 한 몸 추스르기도 버거운 세상, 타인의 손에 끝장나느니 과감하게 내 손으로 끝장내자 정도일까. 아니다. 작가의 메시지는 자살이 아닌 ‘삶’에 있다.
작가는 자살 안내인이라는 특이한 직업을 창조해 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세상 그 누구에게도 못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라고 답했다. 옳은 판단이다. 자살 직전에 못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는가. 즉, 작가는등장인물들의 ‘자살’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라, 자살을 안내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털어놓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즉 ‘삶’에 포커스를 맞춘 셈이다. 자살은 그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도해내는 소설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유도 모르게 몸이 나른해지고 자꾸만 내 안으로 침잠되어 가는 당신, 햇볕이 창창한 여름 날 길거리, 하나같이 까르르 웃고 있는 사람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당신에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권하고 싶다. 혹시 아는가? 이 책을 읽고나면, 한 차례 눈가가 찡해지며 다시금 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