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흔적들의
동료 태성이 살던 운성빌라.
그곳엔 가끔 낯선 사내들이 서성였다.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살기 좋은 지역이 편성되었으니 이 자그마한 땅덩어리를 사들이려는 움직임이 슬그머니 시작됐다. 하지만 그 안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이 주변 이파트 방 한 칸조차 꿈꿀 수 없는 이들이었다. 오늘도 창밖에 어김없이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재개발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펄럭이는 사이로, 그들의 단정한 옷자락이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마치 환영과 경고가 한 화면 안에서 엇갈린 듯한 풍경이었다.
백연이 빌라 입구에 다다르자, 허리를 굽힌 할머니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급히 걷더니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한껏 힘을 주어 사내들 발치로 물을 쏟아부었다. 철썩-, 흙먼지와 함께 양복 바짓단을 적셨다.
“어이, 사 층 총각. 문단속 잘하고 살아.”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마디 툭 던지더니,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 노망 난 할머니, 아주 그냥…”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나 같이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검은색 손수건을 꺼내, 일제히 젖은 바짓단을 닦아냈다. 그 순간 백연의 시선이 멈췄다. 공사장에서 봤던 검은 손수건, 그들의 올린 소매 안에 살갛에 그려진 문양까지. 그때의 사내들과 닮아 있었다. 잠시 시선을 돌리는 사이, 그들은 발끝을 맞추듯 방향을 틀고 차로 향했다. 구두 굽이 아스팔트 위를 두드리며 사라지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백연은 사 층으로 올라, 낡은 철문을 열었다. 삐꺽, 낮은 소리가 울렸다. 창밖에 빛을 가렸던 커튼 사이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왔다.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닫히지 않은 천장의 문, 창틀 사이에 꽂혀 있던 볼펜의 각도, 사소하지만 확실히 어긋난 질서들.
백연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팀원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정돈하긴 했지만, 그들의 손끝이 마지막으로 닿았던 자국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었다. 그래서 알았다. 이 공간에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공사장에서 마주쳤던 검은 양복의 사내들. 그들이 이곳까지 찾아온 걸까. 백연은 한참 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햇빛 사이로 스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우리를 범죄자로 내몬 뉴스와 부장님의 미안하단 말들 하나까지 그 모든 것이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 지워진 이름, 그리고 다시 되살아난 흔적. 그는 모든 것을 찾아야 했다.
백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책상 위 메모지는 방금 전 백연이 사용했던 모양과는 조금 다르게 놓여 있었다. 함께 놓여 있는 볼펜의 끝의 모양이 조금 달랐다. 볼펜으로 메모지 위에 색을 칠해보니 흐릿하게 드러나는 글씨가 보였다. ‘시료 김박사’ 드문드문 보이는 글씨에서 선명해 보이는 자국. 백연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통을 뒤집자 반쯤 찢긴 종이 조각이 굴러 나왔다.
‘LEGATO BIO.’
하얀 메모지 끝에 프린트된 글씨 조각. 검은 손수건에 브랜드처럼 박혀 있던 그 글씨와도 같았다. 작게 찢긴 메모지 조각에, 또렷하게 적혀 있는 작은 숫자 하나.
‘R9’
백연은 숨을 멈췄다. 그날의 기억들과 함께 아픔으로 분류된 사건의 모든 조각이 되살아났다. 불길 속에서 보았던 보고서, ‘R9 실험체 전원 사망’이라 찍혀 있던 붉은 도장, 그리고 사고였다는 말로 덮였던 그날의 방송 자막까지. 분명 사고가 아니라 예정된 폭발, 의도된 삭제였다. 백연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책상을 내리쳤다.
“쾅-”
탁자 위가 진동하며 메모지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레가토 바이오…”
동료들을 앗아간 그 이름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자 증오에 가까웠다.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다시금 머리끝부터 발끝, 온몸을 퍼지게 했다. 심장의 박동이 터질 듯이 울렸다. 그들은 동료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살아남은 백연까지 지우려 했다. 집까지 뒤지고, 이제 그림자처럼 쫓는다. 백연은 의식적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머물다간 자리. 골목 끝에는 아랫집 아가씨, 이설이 서 있었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남은 분노와, 그녀의 표정 속에 스친 불안이 한순간 교차했다.
같은 시각,
검은 사내들의 발길이 닿은 곳은 서울의 높게 솟은 건물 중 하나였다. 건물 안쪽에 들어서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화물이 옮겨질 만한 대형 엘리베이터였다. 문이 열리자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쪽에 금박으로 새겨진 로고가 벽면에 짧게 반사되었다.
엘리베이터는 소리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층수가 드러나지 않은 점이 깜빡이며 그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문이 열리자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흰 복도를 따라 유리문들이 줄지어 있었고, 건장한 사내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각 방마다 희미하게 켜진 조명 아래로 사람의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쪽에선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은색 트레이 위에는 투명한 유리관 안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밀봉된 관 속의 액체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산소 수치 유지하겠습니다.”
“반응 이상 없습니다.”
연속된 기계음이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다.
“삑-, 삑-.”
마치 사람의 심장박동과 비슷한 속도였다.
기다란 복도 끝엔, 금속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사내들이 접근하자 문 옆의 스캐너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정보 확인음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크고 두터운 문이 열리자, 안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안은 병원이라기 보단, 거대한 냉동실에 가까웠다. 일렬로 정렬된 침대마다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투명한 관과 굵은 튜브가 그들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흐르는 관속엔 옅은 푸른빛의 액체가 천천히 통과하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가슴은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죽은 자처럼 보였으나, 분명히 살아 있었다.
“새로운 의뢰자의 서류입니다.”
사내 중 한 명이 서류를 내밀었다. 흰 장갑을 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잠시 후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에 맞춰, 검은 무리의 사내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그들의 구두굽 소리가 복도의 금속 벽면에 메아리쳐 울렸다. 잠시 후 두꺼운 문이 닫히자, 실험실은 다시 완벽한 정적에 잠겼다.
잠시 뒤, 하얀 가운을 벗은 남자가 그들 중 한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버튼에 [49F]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위층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반투명한 금속 벽면에 굳어진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비쳤다.
“왜 이렇게 늦었나.”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고 피로가 섞여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남자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쉽게 건드리지는 마. 잔뜩 독 오른 사람이니까.”
“네. 박사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곳은 방금의 지하층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 커다란 창문, 벽면을 채운 따뜻한 그림들. 모든 것이 정갈했고, 불필요할 만큼 고요했다. 차가운 아래층 연구실이 죽음의 온도였다면, 이곳은 거짓된 생명의 온도였다. 중앙엔 새하얀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정돈된 서류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김박사는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박 실장. 가족과 사이좋은가.”
“네, 나쁘지 않습니다.”
“있을 때 잘해. 사람은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지 않아.”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짧은 말뒤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 박실장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그의 옆으로,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내일, 일정 다 비워. 보안 철저히 하고.”
“네, 박사님.”
박 실장이 박사의 손짓에 나가자, 문이 닫히는 소리만 길게 울렸다. 김박사는 한참 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불빛들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그는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가 사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의 모습이었다.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끝이 사진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오래된 유리틀 안의 먼지가 빛에 반짝였다.
“이 프로젝트만 성공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지하층에서 냉철하게 명령을 내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마저 이내 불안해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불빛이 창가에서 스며들어 그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사진 속의 웃는 얼굴과 겹쳐지며, 한순간 웃음과 어둠이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