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기

조금씩 가까워지는

by 임은

백연은 식탁에 앉아 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전 조직이 그의 집에 침입했을 때 그들이 하나씩 열어본 문들이었다. 평소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던 싱크대 찬문이 어긋나 있었고, 손이 닿았던 자리의 미세한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태성이 살던 집엔 가구가 많지 않았다. 투자용 숙소였기에 필요한 것들만 남아 있었고, 그 몇 개의 가구마다 조직이 확인하고 흔적이 얇은 먼지 위에 찍혀 있었다.


찬장과 옷장.

반면 좁은 서랍들은 뒤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찾던 물건의 크기와 부피가 짐작됐다. 단서나 증거가 아니라, 손으로 들어야 할 ‘무게’를 가진 무엇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쫓는 이유도, 결국 그 물건의 행방 때문일 터였다.

조직이 태성의 집을 털었다는 건 결정적인 힌트였다. 잃어버린 무언가의 크기, 그리고 그 단서를 쥔 인물이 태성이라는 사실. 그들이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남은 흔적을 뒤지는 모습은, 아직 찾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줬다.


운성 빌라.

백연은 3주 전 그곳으로 이사했다.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무너지는 동안, 위로의 손길들이 찾아왔다. 술을 사주겠다는 사람들, 자연스레 합석해 건네던 위로의 말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술자리가 끝나면 그는 늘 3층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위로의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 술에 취한 백연에게 건넨 질문들의 의미가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걸. 백연의 집에서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위해 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애쓰는 행동.


백연은 그동안 놓쳤던 조각 하나를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태성이 남겨둔 열쇠. 그리고 그 열쇠가 가리키는 목표가 조직이 찾는 것과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성에 집엔 이상하리 만큼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오직 이것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보인 것처럼.


싱크대 후드 뚜껑을 열어, 천장에 안쪽에 붙어 있던 열쇠를 꺼냈다. 금속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게 무엇일까.”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빌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어느 날. 아랫집 할머니는 옥상에서 물을 뿌렸다. 떠날 줄 모르는 그들을 향해 양동이에 모아둔 빗물까지 쏟아부었다. 그래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라가 아닌 골목 어귀에서 차를 세운 채, 여전히 이 근처를 맴돌았다.


얼마 후 들은 이야기로는, 분식집 아저씨가 매운 음식 한 그릇을 내어준 덕분에 그들이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이 빌라에 겨우 3주를 살아온 그는, 주민들 사이의 조용한 연대가 그렇게 강한 줄 몰랐다. 입으로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서로의 사정을 모른 척하면서도, 정작 누군가 곤란에 처하면 말하지 않아도 돕는 사람들이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의 덕분에 생긴 잠깐의 빈틈이 있었다. 백연은 아랫집 아저씨의 배달 오토바이를 빌렸다. 눈치가 빠른 아저씨는 자신이 입던 배달 점퍼까지 빌려주었다.


“눈에 안 띄려면 이거 입어요.”

빌라 사람들은 서로 무심한 듯 보이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마음을 읽고 움직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따뜻했다.

“고맙습니다.”

“들키지 말고, 파이팅!”


소곤거림이 마치 첩보작전의 시작 같았다. 빌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백연은 오토바이를 타고 공사장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공사장 맞은편 편의점, 음식점, 문구점. CCTV가 있을 법한 가게들을 우선 살폈다. 하지만 조직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면, 가장 먼저 증거가 될 기록부터 지웠을 터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사장으로 향하는 길목의 가게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CCTV좀 볼 수 있을까요?”

“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동네 좁은 골목길에 샛길로 이어지는 작은 슈퍼.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는 CCTV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텔레비전을 보던 중이라 백연의 말을 흘려들었다.


“제가 강아지를 잃어버렸어요. 이름이 캔디인데. 이제 한 살 됐거든요.”

그 말에 아주머니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어쩌다 잃어버렸대요. 애기를.”

“그러게요. 이 길이 산책길이라 혹시 여길 지나갔을까 해서요.”

아주머니의 표정이 금세 흔들렸다.

“아이고… 그런데 기계는 남편이 만져서 내가 잘 몰라요. 내일 다시 올래요?”

“그러면 좋긴 한데요. 이틀째라… 어른 찾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강아지를 품에 더 꼭 끌어안았다.

“그럼 직접 봐요. 이거 이렇게 누르면 돼요.”


다행히 이곳의 CCTV는 삭제되지 않았다. 3개월 전의 기록까지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백연은 공사장 사고 일주일 전의 영상부터 샅샅이 훑었다. 차가 드나드는 기록은 여럿 있었지만, 이상할 만큼 규칙적이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장면. 태성의 차가 오랜 시간 주차되어 있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장면도 포착됐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사고 이후, 그 차가 더 이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열쇠가… 태성의 차였던 건가.”

백연은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사고가 나기 전, 태성은 전화를 걸어왔다.

“차가 고장 났어요. 맡기려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때는 단순한 일상 대화였다. 하지만 이제야 그 말의 뜻이 달리 들렸다. 그건 보고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태성이 맡겼던 카센터. 그게 열쇠의 목적지라면, 그는 분명 이름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대화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공사장 주변, 경찰서 인근, 집 근처까지. 등록된 카센터는 200곳이 넘었다. 백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장’이라고 말하던 그날, 태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굳이 그 말을 나에게 남겼을까.


태성의 동창이 운영하는 카센터. 죽마고우라던 이름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백연은 조용히 인사하며 들어섰다. 그곳은 한적했다. 갓 문을 연 듯, 기름 냄새조차 옅은 카센터. 바닥은 마른 먼지로 덮여 있었고, 정비 중인 차량 한 대조차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장례식 이후에 마음이 정리가 잘 안 돼서요. 얼마 전에야 다시 문을 열었어요.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성의 이름이 입가에 닿자, 그의 눈가가 젖었다.

“그때… 그날 일만 아니었어도, 친구한테 좀 더 따뜻하게 할걸.”


“마음고생 많았겠어요”

“형님도요. 저도 한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계음도, 사람 소리도 없는 카센터 안에, 그들의 말소리가 울릴 뿐이었다. 백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태성의 이야기를 꺼내자, 건장한 사내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백연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사내가 불쑥 물었다.

“아, 형님. 태성이 차 찾으러 온 거 아니에요?”


“태성이 차요?”

백연은 걸음을 멈췄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 지하예요. 장기 정비 들어간 차들이 있거든요.”


그가 안내한 계단 구석, 지하의 어둠 속에 태성의 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얗게 먼지 쌓인 차체. 오랜 시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형님이 열쇠 가져올 거라고 해서, 그냥 보관만 하고 있었어요.”


백연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금속이 딸깍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열었다. 정확히 들어맞았다. 트렁크를 열자, 가득 쌓인 물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검은 가방이 눈에 띄었다. 오만 원권의 빳빳한 돈다발. 그들이 찾던, 부피가 큰 ‘그 물건’이었다.


태성의 차는 그날 이후 줄곧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돈이 무엇인지, 왜 조직이 이를 쫓는지 그제야 백연은 모든 의문이 하나로 이어지는 걸 느꼈다.


‘백억’ 그들이 말한 그 숫자.

직접 만져본 적 없는 돈의 무게였지만, 트렁크 안의 빳빳하고 진한 종이 냄새가 묘하게 숨을 쉬는 듯했다. 그 무게와 냄새, 손 끝에 스미는 감촉이 그 말의 진실을 대변했다.


태성, 백억, 조직.

세 단어가 백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서로 다른 악보 위에서 같은 리듬을 연주하듯, 어울리지 않는 세 조각이 하나의 멜로디가 되고 있었다. 태성이 왜 이 돈을 숨겼는지, 그가 조직과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이 돈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든 질문의 끝에는 불길 속 그날이 있었다.


그날의 연기가 아직도 백연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타들어가는 냄새, 무너지는 철골. 그리고 다시 부를 수 없는 이름들. 백연은 눈을 감았다. 불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동료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백연의 빌라 차창 너머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불빛 하나가 깜빡였다.


누군가 그를 지켜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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