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비

흔적이 된

by 임은

레가토는 주기적으로 ‘정리’를 했다. 표면상으론 ‘사업 재정비’였지만, 실상은 ‘사람’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기록과 증거를 없애는 작업. 지난번 경찰 네 명이 희생된 그 현장도, 바로 그들의 정리 중 하나라고 했다.


“이설 씨.”

지혁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레가토가 다시 움직였어요. 이번엔 돈이 아니라 사람을 정리해요. 삭제해야 할 사람들의 리스트가 있겠죠.”

이설은 잠시 숨을 멈췄다.

“정리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쉽게 말해서, 그들의 세탁 시스템 안에 불필요한 존재를 없애는 거겠죠.”


지혁의 말에 이설은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401호, ‘백연’ 동조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감시자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 혹, 증거가 될 인물.


지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이설은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레가토의 내부 정리… 돈이 아니라 사람을 지우는 일.’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구해야 할 사람, 밝혀야 할 진실, 그리고 닿을 수 없는 벽. 그 벽은 냉철했고, 무거웠고, 사람의 목숨조차 숫자로 계산했다. 빌라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던 중,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백연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채, 어딘가 서둘러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요즘 자주 움직이시네요. 진짜로 술도 안 드시고.”

“네.”

이설의 말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 짧은 음절 뒤로, 묘한 공기가 흘렀다. 백연의 뒷모습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어디선가 검은 차 한 대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눅눅한 밤공기에 골목 끝에서 들려온 낯익은 낮은 목소리. 짧고, 거칠고, 익숙한 음색이 들렸다.


“윽-.”


그 짧은 신음과 함께, 검은 차가 사라졌다. 이설은 곧장 헬멧을 눌러썼다. 오토바이 시동이 울렸고, 바퀴가 도로를 갈랐다. 한참을 쫓아 도착한 곳은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


창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음성들.

“백연, 우리가 물벼락까지 맞아가며 점잖게 하려 했는데. 안 되겠네. 이 정도면 정중한 초대 아니야? 응?”

의자에 묶인 백연은 봉투에 눈이 가려져 있었고, 입엔 파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남자 하나가 각목을 휘두르며 주변을 돌았다. 그는 다른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를 보냈다. 백연의 눈을 가리던 봉투가 벗겨지고, 파란 테이프가 떼어졌다. 거칠던 그의 말투가 조금은 너그러운 듯 말을 꺼냈다.


백억, 당신이 가지고 있지?”

“그게 무슨….”

“뭐 처음에 다들 그렇게 모르척 하지. 잘 생각해. 당신이 숨긴 돈이야. 경찰 네 명이 죽던 그날. 그 현장에 있었잖아.”

“난 늦게 도착했어. 공사장은 이미 불타고 있었고.”

“그래? 그럼 정보라도 흘렸을 거 아냐?”


각목 끝이 불길에 닿자, 불씨가 튀었다. 붉게 달아오른 각목 끝은 공기를 태우며 백연의 뺨 가까이 다가왔다. 매캐한 냄새가 번졌다.

“쉽게 말 안 하네. 좋아. 그럼 간단하지. 죽으면, 모르는 걸로 끝이야.”

“맘대로 해.”

백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게 오히려 그들을 자극했다.


“이 자식이!”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젠장, 누가 신고했어!”

“도망쳐!”


각목이 바닥을 굴렀고, 남자들이 불처럼 빠져나갔다. 남겨진 건 숨을 몰아쉬는 백연뿐이었다. 이설은 골목 뒤편에서 조용히 오토바이를 돌렸다. 백연은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에게 쫓기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감춘 건 돈이 아니라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백연은 부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의무감과 피로가 뒤섞인 공기였다.


“연락이 어렵더니, 이렇게 만나네요.”

부장은 백연의 거칠어진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일이었던 거야. 왜 잡혀 간 거야.”

“글쎄요. 모르겠어요. 협박을 받는 중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놈들이 도망갔어요.”


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면목이 없네. 나만 살고자 해서.”

“그랬겠어요? 위에서 압박이 있었겠죠. 더 이상 물어서 뭐해요. 부장님도 곤란할 텐데.”


백연은 잠시 눈을 떼지 않았다.

“대신, 오늘 신고한 사람만 알려주세요.”


부장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신고 시 적혀 있던 메모였다.

-20대 여성, 다급하지 않은 목소리. 숨어서 전화를 건 것으로 추정.


백연의 시선이 흔들렸다. 떠오르는 얼굴은 단 하나였다. 301호 아가씨, 이설. 늘 자신을 감시하던 눈빛의 주인.


빌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는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설이었다. 불빛 아래, 무릎을 세운 채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끝엔 아직 휴대폰 불빛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얼굴이 엉망이네요.”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났어.”

“제가 신고한 거 아시나 봐요.”

백연은 짧게 숨을 고르며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어둑하게 번져 있었다.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아저씬 늘 수상했어요.”

“뭐가?”

“그 사람들하고 연결된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아저씨가 감시당했네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시선이 가늘게 부딪혔다.


“뭐 어디까지 아는 거야.”

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아는 만큼 저도 알겠죠.”

백연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프니 웃지 말아요. 경찰 아저씨라더니 싸움을 영 못하나 봐요.”

“아니, 내가 묶여 있어서… 아, 아.”

“그러게요. 말은 그렇게 많으면서.”

이설은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희 집에 들러요. 치료라도 받고 가요. 그 집에 반창고 이런 게 있겠어요?”

301호, 이설의 집에 문을 열었다. 안은 생각보다 텅 비어 있었고, 서랍 위엔 약봉지와 붕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설씨 집엔 약이 많네.”

“저희 집 아니고 이모 집이에요.”

이설이 연고를 바르며 말을 이었다.

“이모 딸이 아파서 병원에 있어요. 이모는 가끔 오고요. 저는 어서 병원비 벌어서 수술시켜야 해요. 이래 봬도 소녀가장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밤마다 나가서 일하는 건가?”

“네. 돈 벌려면 나가야죠. 법적으로만 살면 굶어요.”

백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눈에 잠시, 이설의 어둠이 비쳤다. 세상과 맞서 싸우는 사람의 눈빛이었지만, 그 안엔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절박함도 담겨 있었다.


이설의 손끝이 백연의 뺨을 스쳤다. 밴드를 붙이며 이설이 말했다.

“다음엔 이런 일 생기면 눈치라도 줘요.”

“뭐. 걱정돼서?”

“몰라요? 여기 빌라 사람들. 자기 살길 찾는 척하면서 실상은 아저씨 지키는 거예요. 행동은 이미 가족이에요.”


백연은 머릿속이 무거웠다.

“아랫집 할머니, 윗집 아저씨 걱정하니까 그 아저씨들한테 당했다고나 하지 말고요.”

백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한편, 도시 외곽의 인력사무소.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오갔다.


“그 빌라에선 아무것도 안 나와요. 장판까지 뜯어봤는데, 없습니다.”

“그래서 협박했잖아. 뭐라도 말했어?”

“진짜 모르는 눈치예요.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지도.”

한참의 침묵 끝에, 누군가 의자를 밀었다. 나무 소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울렸다.


“그럼 계속 예의주시 해.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 빌라에 사는 여자도.”

“여자요?”

“그래. 이름이… 이설이라고 했나?”

불빛 아래서 누군가 미세하게 웃었다.


“예전에 일거리 찾는다고 왔던 그 아가씨 맞죠?”

“그 빌라 살더라고. 연관이 있겠지.”

“아마 신고도 거기서 한 게 아닐까 싶은데.”

유리잔이 탁자 위에서 부딪혔다. 잔 속의 얼음이 천천히 녹으며 미세한 균열음을 냈다.

“이설… 그 여자, 재밌네.”

“관찰부터 해. 그녀가 움직이면, 백연도 따라 움직이겠지.”


바람이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먼지가 한줄기 빛 속에서 반짝이며 흩어졌다. 그 작은 흔들림 속에서, ‘정리’의 목록이 다시 갱신되었다. 레가토는 이름 없는 숫자들이 나열된 노트에 처음으로 이름을 적었다.


-301호 이설.


그들은 실패가 아니었다. 누구를 감시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누구를 쫓아야 할지, 더 명확해졌다. 그 시각, 빌라의 불이 하나둘 꺼져갔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그 불빛이 이설의 노트 위, 한 문장을 가리켰다.


-정리되는 건, 정보가 아니라 사람.


이설을 펜 끝을 꾹 눌렀다. 잉크가 번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설의 귓가에 머무는 것 같았다. 이설은 낮게 속삭였다.


“이제, 나도 그들의 명단 안에 들었겠네.”


그 말이 공기 속에 흩어지자, 빌라의 불빛이 더욱 강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곤 곧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그것은 폭풍이 오기 전의, 잠시 숨을 고르는 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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