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악당의
‘경찰이었던 아저씨, 억울한 비리 경찰이라는 꼬리표, 사망한 동료 네 명.’
이설은 종이에 천천히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모으는 일은 어쩌면 단순했다. 하지만 얽힌 실타래를 푸는 일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레가토 조직.’
그 이름을 적는 순간, 펜 끝이 잠시 멈췄다. 글씨는 또렷했지만, 그 어디에도 연결된 흔적이 없었다. 서로 다른 점들이 흩어진 채, 아직 하나의 그림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그 조직이 ‘경찰 아저씨의 집’까지 드나든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가득 들어 있는 굵직한 목소리. 이설은 고개를 들어 창문 밖에 내다봤다. 하늘에서, 아니- 옥상에서 무언가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물줄기, 그리고 그 아래서 허둥지둥 날뛰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 비가 아니었다.
“할머니 또 시작이네.”
이설이 작게 중얼거렸다. 101호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옥상에 올라가 ‘세척용 물뿌림’을 하셨다. 그건 단순한 청소가 아니었다. 주변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 물줄기의 방향이 유독 낯선 양복쟁이들을 향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젖은 머리로 달아나는 남자들의 욕설이 골목을 울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빌라 입구에서 담배 피우지 말랬잖아. 재수 없게!”
그날도 그렇게 정화는 끝났다. 잠시 후, 401호 백연이 빌라 문을 나섰다.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뒤를 건장한 사내들이 일정한 거리로 뒤따랐다. 조직의 묵직한 발걸음이 이어졌고, 그 소리와 함께 빌라의 숨소리도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설은 창문에 기대 그 장면을 지켜봤다. 누군가를 쫓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사이를 걸어가는 백연. 도망치는 것도, 맞서는 것도 아닌 이상한 침착함.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
어느새 다시 빌라 앞에 주차된 검은 차. 101호 할머니는 구정물이 담긴 물통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사내들 발길 사이로 물이 퍼부어졌다. 욕설이 섞인 소리가 퍼졌고, 참지 않겠다는 사내가 할머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잠옷 바람으로 집에서 뛰쳐나온 201호 아저씨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의 욕설이 할머니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욕먹고 오래 살아서 니들 계속 괴롭히겠다는 말로 화답해 주었다. 이설은 그 당찬 응수에 피식 웃었고 조직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하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조직의 차는 빌라 문 앞이 아닌 골목길에 주차되었다. 사람들이 한 번씩 오가야 하는 그 자리에 상시 세워져, 가로등 불빛 아래서 머뭇거리며 감시를 이어갔다. 그들의 움직임이 고정된 골목에는, 이제 빌라 사람들만 아는 불문율이 생겼다.
“검은 차 배달은 안 받아요.”
그 말을 처음 한건 302호 김 씨 아저씨였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몰고 틈날 때만 다 배달일을 하고 공사장을 오가며, 퇴근 후엔 어린 딸 소영이를 품에 안고 자던 그 남자.
“지난번에도 그놈들 짜장면 시켰길래 그냥 도로 갔지. 우리 빌라 어슬렁 거리는 놈들한테 팔긴 아까워서.”
이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었다.
“그러다 배달일 잘리면 어쩌려고요.”
“뭐, 불만 있으면 다른 일 해야지. 이 동네 배달일 엄청 많아.”
그 말에, 맞은편 102호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김 씨, 요 앞에 선 그어 놓고 그림자라도 넘어 서거든 물통 좀 부어. 할머니 허리 나가.”
“아니, 아주머니는 맨날 남한테 말로만 일 시켜서 편하겠어요?”
“그럼 내가 나가서 싸워줄까? 몸 성한 사람은 김 씨밖에 없는데?”
티격태격 말싸움 같지만, 그 속엔 서로의 몫을 지켜주는 묘한 신뢰가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이지만 막상 누가 하나 다치면 다 나와서 달려드는 사람들. 그게 이 빌라의 방식이었다. 그런 투덜거림이 이곳에선 가장 믿을 만한 약속이었다.
201호 부부는 자영업자였다. 낮엔 분식집을 하고 밤엔 재료 정리를 하느라 바쁜 그들도 빌라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여보 CCTV 그거 아직 살아 있지?”
“응 앞 골목이랑 후문 둘 다 찍히고 있어.”
“그놈들 우리 분식집에 와서 먹길래, 매운맛 좀 보라고 매운 고춧가루 잔뜩 넣어서 만들어줬지. 속 꽤나 쓰릴 거야.”
“이 빌라 사람들, 서로 돕고 사는데 이상한 놈들이 건드리면 안 되지.”
그들에겐 장사꾼의 이익보다 우리 구역을 지키려는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분식집은 그날 이후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사내들을 감시했다. 누구라도 낯선 발자국이 보이면 빌라 사람들에게 보고가 되었다. 라디오 볼륨은 낮췄고, 모니터 불빛이 반찬통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202호 몸이 불편한 아들을 돌보는 아주머니는 거의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세상의 소리 예민했다. 그날도 창문을 살짝 열고 빌라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골목 어귀에서 그놈들의 자동차 엔진음이 들리면 101호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왔어요.”
“또 왔지? 알았어.”
그 짧은 통화로, 빌라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경보였다. 불빛 한 번, 두 번, 창문 스위치를 껐다 켤 때면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슬리퍼 소리를 내며 곧장 내려왔다. 이설은 창문가에 앉아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움직이는 빌라는 지켜봤다.
“오늘도 작전이네.”
201호 아저씨는 일부러 쓰레기봉투를 들고나갔고, 302호 김 씨는 오토바이를 세워 길목을 막았다. 101호 할머니는 빗물통을 챙겼다.
“넘어오면 바로 간다.”
서로의 눈빛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들에겐 계획표도 흔한 무전기도 없지만 누구보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움직였다. 언뜻 보기엔 단순한 동네 소동처럼 보였지만, 이설은 알고 있다. 그들만의 작전이라는 것을.
그날 밤 이후, 검은 차는 더 이상 함부로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검은 차는 빌라 앞이 아닌 골목 어귀에 여전히 머물렀지만 빌라 쪽으론 발길도 들이지 못했다. 물벼락, CCTV, 소문과 신호.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서로 싸우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묘하게도 하나의 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영웅은 아니었지만 각장의 작은 악당다움이 서로를 덮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 안이 ‘툭’ 소리와 함께 어둠에 잠겼다. 전원이 나갔다. 창밖의 불빛도, 복도의 등도 모두 꺼져 있었다. 해가 진 뒤에 저녁, 어둠은 느리게 빌라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일은 낡은 빌라에선 흔한 일이었다. 전기 공사 비용이 부담스러워 다들 미루고 있었고, 곧 재개발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핑계가 되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옆집 소영이였다. 아빠는 벌써 일터로 나갔을 시간이었다. 이설은 휴대폰 불빛을 켜고 옆집으로 가, 소영이를 품에 안아 달랬다.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철제 계단을 따라 흔들리는 희미한 불빛. 401호 백연이었다.
“두꺼비집 어디 있어요?”
불빛 하나 없는 계단을 핸드폰 손전등에 의지한 채 내려오더니, 마주친 이설에게 물었다.
“1층 계단 뒤쪽이요.”
이설이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엔 공구상자, 다른 쪽엔 불빛. 그는 조용히 두꺼비집을 열고 배선을 확인했다. 묵직한 공구 소리가 울리더니, 곧 전원이 찰칵하고 살아났다. 순간 복도의 불이 번쩍 켜졌다. 깜빡이던 조명 아래로 아이의 울음이 멎었다. 갑작스러운 정전 소동에 놀랐던 주민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나왔다.
“두꺼비집이 오래돼서 그래요. 내일 제가 전체 교체해 놓을게요. 이대로 두면 자주 나갈 겁니다.”
전기가 돌아온 빌라 복도에는 다시 평온이 깃들었다. 깜빡이던 조명이 안정되자, 주민들은 마치 큰일이라도 끝난 듯 안도하며 흩어졌다. 401호 할머니는 연신 ‘이런 날씨에 전기가 나가면 큰일이지’라며 허리를 토닥였고, 102호 아주머니는 ‘젊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라며 웃었다. 급히 달려온 302호 김 씨는 아무 말없이 새 전구를 확인하곤, 소영이에게 사탕을 쥐어 주었다.
이설은 그런 풍경을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았다. 복도 조명 아래 경찰 아저씨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번졌지만, 그 눈빛엔 묘한 그림자가 어렸다. 마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처럼.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그의 친절은 이설의 눈엔 이상하게 걸렸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세심하게 쌓아 올린 친절 같았다. 그 다정함이 오히려 가시처럼 마음에 박혔다. 그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펜 끝이 종이 위를 스쳤다.
‘레가토 조직- 401호 경찰 아저씨, 운성빌라 사람들’
삼각형으로 연결된 고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 조직인지 아저씨인지 빌라 사람들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비밀을 안고 사는 한, 우리 모두가 무언가가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정전처럼 그 시작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정전처럼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