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어둠의
며칠 전, 지혁의 의뢰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의 부탁은 ‘아버지의 범죄를 막아달라’는 것. 이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이설이 조용히 말했다.
"그건, 법으로 심판할 수 있지 않나요?"
지혁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눈엔 오래된 절망이 스며 있었다.
"이설씨가 의뢰를 받고 하는 일, 그건 왜 법정이 아닌 곳에서 이뤄질까요? 법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이설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는 법을 넘어서는 일은 하지 않아요. 피해자의 마음을 대신할 뿐이죠."
"그 마음을 대신한다는 건 결국, 타인의 죄를 대신 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사적 응징으로 심판을 대신하는 건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위험한 일이에요. 그걸 정의라고 부르면… 더 위험해지죠."
지혁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더는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복수는 죗값을 묻는 일이에요. 다만 그 방식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죠. 이설 씨가 하는 일도, 법으로 따진다면 언제든 죄가 될 수 있어요."
그날, 머릿속에 스친 지혁의 목소리는 이설의 머릿속에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잘못을 두 눈으로 보고도 외면할 수 없다는 그의 절박함.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는 아직,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단지 확인해야 했다. 그가 말한 세상의 어두움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 어둠이 얼마나 깊고, 그의 마음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그렇게 이설은 결심했다. 지혁이 입 밖으로 꺼낸 이름을 따라가 보기로.
[레가토 바이오]
서울을 지날 때마다 보아왔던 거대한 건물. 수십 번 스쳐 지나갔던 풍경 속에 지혁이 멈추고 싶어 하는 일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설의 가슴 어딘가가 서늘하게 저려왔다.
건물 앞을 나서는 사람들은 모두 건장한 체격에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어제 빌라 근처를 서성이던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열댓 명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중 한 명, 분명 어제 빌라 앞에서 시선을 마주쳤던 사내였다. 그가 왜 이곳에서 나오는지, 이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수십 대의 차량이 동시에 움직였다. 잠시 확인만 할 생각이었지만, 호기심은 어느새 불안으로 변했고, 이설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작은 동네의 외진 건물 3층. 반쯤 떨어져 나간 간판엔 ‘인력사무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일지도 몰랐다. 이설은 헬멧을 벗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일자리를 구하러 왔는데요.”
자유롭게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몇 초간의 침묵 뒤, 건장한 남자가 의자를 밀치며 다가왔다.
“이리 오세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긴 처음이신가. 젊은 아가씨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말투가 어색하게 들렸다.
“네. 급하게 돈이 좀 필요해서요.”
이설이 말을 꺼내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요즘 다 그렇죠.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 그런 게 필요하잖아요?.”
“네. 그렇죠.”
“위험수당이 좀 붙어서 한두 달만 투자하면 꽤 큰돈 벌 수 있어요. 어때요, 관심 있어요?”
“일단 어떤 일인지 들어보고요.”
그때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낮게 말했다.
“그럼 관심 생기면 다시와요. 이런 일자리는 아무한테나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돈이 급해지면 다시 찾아요.”
이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 떠밀리듯 문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 일은 수상했다. 한두 달만 투자하면 큰돈이 생긴다는 말, 쉽게 돈을 번다는 말. 그건 절박한 사람을 노린 미끼였다. 그 돈은 결국 누군가의 피로 쓰인 대가일 것이다.
이설은 휴대폰을 꺼내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만나죠.”
그날 저녁, 두 사람은 한적한 카페의 구석 자리에 마주 않았다,
“일을 시작했다는 말, 무슨 뜻이죠?”
지혁이 조심히 물었다.
“변호사님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들의 건물을 따라갔죠. 그리고 인력사무소라는 곳까지 들어갔어요. 수상한 이야기를 들었죠.”
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쉽게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나요?”
“그런가 봐요. 한순간에 떼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 그게 전부였어요.”
지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은 생업이 막다른 사람들을 찾아요. 쉽게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로 사람을 끌어들여, 실험에 투입시킵니다. 서류상으로는 모두 자발적인 계약이에요. 서명도 있고, 법적인 절차도 완벽하죠.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였다.
“실험에 들어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투입된 자는 있지만, 실험이 끝난 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어요.”
이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돈이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필요 없는 거군요.”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레가토는, 절박한 사람들을 먹고사는 조직이에요.”
그의 말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이설은 숨을 고르며, 자신의 목소리를 꺼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하고 단호한 눈빛.
“증거요. 사람이 싸우기엔 힘이 약하죠. 레가토처럼 자본과 연결된 조직은 정치, 경제 권력과 엮여 있어요. 정부가 손대려 해도, 문서 몇 장과 계좌 몇 개면 누구나 묻히죠. 그래서 필요한 건, 숨길 수 없는 ‘물리적 증거’입니다. 사진이나 영상, 물류기록, 실험 계약서 같은 것들.”
이설은 그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인력사무소에서 들은 낮은 웃음소리, 건물 앞을 스치던 검은 밴의 번호판,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가 잇따라 떠올랐다. 손끝이 서늘해졌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생체 실험.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실험이라면서,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는 그들의 논리는 도모지 납득되지 않았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 위에서, 그들을 막기 위해선 증거가 절실히 필요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방법 안에서… 증거를 모아보죠.”
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미소라기보다, 오래 묵은 한숨이 빠르게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는 이설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함께 하는 겁니다. 혼자가 절대 아니에요. 증거만 찾으면, 제가 법적으로 자료를 만들게요. 불법적인 일들을 터트릴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모은 다음에, 그 뒤엔 제가 하겠습니다..”
이설에 손에 지혁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 너머엔 결의가 있었다. 그 순간 이설은 알았다. 이 싸움은 단 한 사람의 복수를 넘어선다는 것을. 그녀의 숨결이, 조금 더 깊어졌다.
빌라 앞, 뒤쫓던 그 사람들이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골목 끝,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 셋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분명 불법 실험을 일삼는 조직이라 들었는데, 왜 이 끔찍한 사람들이 이곳까지 온 걸까. 이설은 창문 뒤로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너무 익숙했다. 마치 이미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의 무리 중 일부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4층일 텐데- 그럼 새로 이사 온 아저씨 집. 오늘 낮, 인력사무소에서 말을 건네던 그 남자였다. 이설의 시선이 창틀에 고정됐다. 그들이 드나들던 시기와, 아저씨가 이사 온 날짜가 묘하게 겹친다. 이설은 핸드폰 메모장에 날짜를 적었다. [이사-10월 28일 / 검은 밴 목격-10월 29일] 불과 하루 차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레가토는 절박한 사람을 먹고 산다.”
지혁의 말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살아났다. 절박한 사람- 그건 아저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가토는 법의 그물을 교묘히 피해 간다. 그들은 제 발로 일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만 골라내다. ‘자발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감췄다. 그런데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건,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 통로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설은 커튼을 살짝 내렸다. 위층 아저씨가 조직이 서성거리는 길을 지나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둘 사이에 눈치도, 인사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이설은 숨을 고르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아저씨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의 실체가 위험해질 때, 그들은 늘 감시를 강화한다. 주인이 없는 집에까지 드나드는 건, 이미 누군가를 관리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서성 거렸다. 이설이 4층을 올려다보자, 4층 창문 너머로 아저씨의 시선이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그의 눈빛에 두려움도 경고도 없었다. 그저 묘한 체념과 말하지 못한 진실이 깃들어 있었다.